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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4 17:18 수정 : 2007.06.21 14:00

박용현/24시팀장

한겨레프리즘

△1925년 음력 5월14일 경북 성주군 청파면에서 태어남: 네살 때 대구 새못안이로 이사.

△여덟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심: 성격이 괄괄하여 남동생 용직과 자주 치고받고 싸울라치면, 엄격한 오빠는 “이, 돼지바우”라며 혼을 내곤 했다.

△아홉살 때 함남 북청군 신창면에 양녀로 감: 가난 때문이었다. 양어머니 김옥주는 옛날 권번의 졸업장이 있는 기생이었다.

△열다섯살 때 대구를 다녀감: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던 그는 단발머리에 양단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동네 유지 집에 시집가라는 어머니 성화를 끝내 뿌리치고 돌아갔다. 한 손가락으로 볼을 짚고 찍은 사진 속에서 그는 곱게 웃는 모습으로 남았다.

△열여섯살 때 양어머니에 의해 청진의 일본군 위안소로 팔려감: 거기서 ‘모모코’가 됐다. 임신을 막는 독한 수은약을 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열여덟살 때 다시 만주 훈춘의 위안소로 350원에 팔려감: 평일에는 주로 군관들이, 토요일에는 병사들이 왔다. 담배를 배웠다.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청진에서 ‘38선 이남으로는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훈춘으로 돌아옴: 중국 정부가 실시한 호구조사에서 청진 출신으로 기록되는 바람에 북한 국적을 갖게 됐다.

△이후 50여년 동안 몸과 마음의 후유증을 앓으며 훈춘에서 쓸쓸히 살아감: 중국인과 결혼하기도 했고 한족 여성을 양딸로 삼기도 했다. 자궁 수술 등 몇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1998년 시민단체들이 중국에 살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귀향을 추진: 북한 국적이 걸림돌이 됐다. 탈북자 문제가 겹치면서 중국 내 북한 국적자의 국외여행은 엄격히 통제됐다. 중국 국적 취득을 시도했다.

△1998년 9월 언니 옥술, 동생 용직과 상봉: 이미 노인이 된 언니와 동생은 죽기 전에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겠다며 훈춘까지 긴 여행에 나섰다. 쌓인 회한을 풀기엔 너무 짧았던 나흘 동안의 만남. 동생은 누나를 자루에 넣어서라도 고향으로 데려가자고 떼를 썼다. 누나는 밥도 먹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1999년 11월11일 동생 용직 숨짐: 폐병이 재발했다. ‘누님을 빨리 모셔와야 한다’는 게 유언처럼 그가 남긴 말.

△2000년 12월 국적이 중국으로 변경됨: 중국 여권으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그해 겨울은 아마도 그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으리라.

△2001년 2월6일 폐암으로 숨짐: 고향 땅을 코앞에 두고, 그를 돌보던 조선족 중국 관리 엄관빈이 홀로 지켜보는 가운데 60년 이역 생활을 고통 속에 마감했다. 엄관빈은 깨끗한 속옷과 비단옷을 입혀드렸다. 이튿날 화장.

△2001년 3월8일 조카가 유골을 모셔옴: 이튿날 대구시립공원묘지에서 시민단체들이 장례식을 치렸다. 이곳 납골당 신관 2250호가 그의 영원한 집이 됐다.

△2001년 4월23일 언니 옥술 숨짐: 재가 되어서나마 돌아온 동생을 맞이한 뒤, 세상을 홀가분하게 버릴 수 있었나 보다.

지난 21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남북이 공동선언을 발표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헛헛하여 할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9년 전 남북이 마음을 모아 할머니를 모셔올 수는 없었던 것인지…. 할머니를 처참한 삶으로 몰아넣을 때는 질풍과도 같았던 역사가, 할머니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너무도 더뎠지요. 훈춘에서 지켜보던 세 남매의 눈물나는 상봉이 엊그제 같습니다. 지금은 세 분이 깊은 주름살을 펴고, 아옹다옹 다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깔깔깔 웃음소리 큰 나날을 보내고 계시리라 믿어봅니다.

박용현/24시팀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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