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현/편집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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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붉은 그물망을 헤집고 양파가 연둣빛 싹을 내민다. 여기는 뒷베란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감자들도 흙 묻은 얼굴들을 맞대고 두런두런 얘기한다. 붉은 그물이 아무리 촘촘해도, 비닐봉지 속이 아무리 캄캄해도 양파와 감자의 새 싹을 막지는 못한다. 봄이다. 어수선한 봄. 먼저 경칩에 개구리 튀어나오듯 땅속에 잠자던 국가보안법이 기지개를 폈다. 경찰이 해묵은 공안사건들을 다시 수사하고 있다. 지난달 북한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글을 올렸다고 남북공동실천연대 선전위원장이 구속됐다. 사흘 뒤엔 전교조 교사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이적표현물을 유포했다”는 말만 할 뿐 상세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다. 또 그 사흘 뒤 범청학련 남쪽본부 의장인 윤기진씨가 구속됐다. 1999년 대학 휴학생을 밀입북시킨 혐의로 수배를 받은 지 9년 만이다. 콕 찍어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보안법 사건이 부쩍 잦아졌다.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보안 분야 경찰관들이 실적을 올리려, 지나간 사건들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민단체에선 “경찰 등 공안기구들이 법질서를 세운다는 이명박 정부와 코드를 맞추기 위해 취임 전부터 대대적 공안탄압에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182일 동안 농성을 벌여온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강제철거도 마찬가지로 법질서 확립 차원이다. 비정규직 수가 정규직을 이미 넘어섰는데, 한번이라도 불법 하도급과 파견과 차별이라는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을까? 하기야 노동자의 권리를 ‘떼법’이라고 닦아세우는 이명박 정부니까. 정책연대 동반자인 한국노총조차 “비정규직법의 허점을 악용한 사용자는 방치한 채 노동자만 때려잡는 셈”이라고 반발했다. 개구리가 뛰니 색깔론도 천방지축 널뛴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에 이어 유인촌 문화부 장관, 나경원 대변인도 앞다퉈 지난 정권의 인물과 좌파 법률을 청산하겠다고 으르댄다. 안 대표는 “같은 이념과 국정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국정을 책임지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에서 그 정권의 이념과 국정 철학에 맞추어서 임명된 사람들은 정권교체가 되었으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과 국정 철학에 맞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사의를 표하고 재신임을 묻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유인촌 장관이 “이전 정권의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자연스럽다”며 공개 사퇴를 촉구한 바 있다. 가장 반문화적 방식으로 문화의 권력교체를 시도했다. 독립성과 다양성이 생명인 예술분야에서 점령군처럼 자기들의 코드를 심으려는 색깔몰이다. 더구나 사퇴를 요구하는 이유나 검증잣대를 내놓지도 않는다. 나 대변인도 거든다. “지금 대통령과 장관만 바뀌었을 뿐 정부 곳곳에 국정운영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남아 있어 진정한 정권교체가 되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라며 “정권교체를 한 국민의 코드와는 너무나 다른 좌파이념에 매몰된 사람들, 유별난 디엔에이(DNA)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국민의 뜻에 따라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은 다 안다. 공천 탈락자들의 자리 마련에 나섰다는 걸. 이명박 정부 들어 새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난 화분도 많이 갈 것이다. 난이 촉을 내민다. 붉은 그물을 뚫고 양파도 연둣빛 촉을 내민다. 아무리 옥죄도 옥죌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멀리서 봄이 달려온다. 튀밥처럼 터지는 봄.손준현/편집담당 부국장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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