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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3 18:07 수정 : 2019.03.04 14:57

박민희

통일외교팀장

“닭을 죽여 원숭이를 겁주다.” 누군가에게 경고하려고 다른 대상을 혼내는 것을 뜻하는 중국 속담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을 ‘노딜’로 끝낸 것을 지켜보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 말을 떠올렸을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장에서 걸어나온 뒤 기자회견에서 “나는 협상장에서 걸어나오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중국과도 그렇게 할 것”이라며 시 주석을 향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이번 회담이 합의 없이 끝난 주요 원인은 지도자의 결단에 지나치게 의지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실무진이 마련한 합의문 초안에는 종전선언과 연락사무소 등은 있었지만, 핵심인 핵 폐기와 제재 해제 범위에 대해선 두 지도자가 담판으로 결론을 내도록 비워뒀던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 이외 핵시설과 미사일을 비롯한 대량파괴무기(WMD)까지 요구했고,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완전 폐기하겠다며 제재의 핵심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서로의 간극이 너무 컸다.

주변 요인들도 있었다. 국내 정치에서 사면초가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주류 정치권이 회의적, 냉소적으로 보는 북한과의 ‘어정쩡한’ 합의로 비난에 휩싸이기보다는, 이달 말께 열기로 한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중 무역전쟁과 관련해 중국의 큰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판세를 뒤집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과의 회담장을 걷어차고 나오는 벼랑 끝 전술로 중국을 겁 줘 양보 또는 굴복을 얻어낸다면, 지지율을 일거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직후인 28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에서 어두운 표정의 김정은 위원장이 차에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다. 하노이/지지통신 AFP 연합뉴스
시 주석은 지난해의 쓰라린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2018년 5월과 7월 류허 부총리가 이끄는 중국 대표단은 윌버 로스 상무장관, 므누신 재무장관 등 미국 대표단과 무역전쟁을 끝내는 잠정 합의를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중국 정부가 기업과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경제 정책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요구 수준을 크게 높였다.

미국과의 핵 담판에 나서기까지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시진핑 주석과 4번의 정상회담을 했고,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하러 싱가포르에 갈 때는 중국 비행기를 빌려탔으며, 이번에 하노이까지는 왕복 120시간이 넘는 중국 횡단 대장정을 했다. 미국을 향해 ‘내 뒤에 중국이라는 후원자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시진핑 주석이 북-미 사이에 적극적 중재자로서 나서거나,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려 할 가능성은 낮다.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 최대 과제이고, 국내 경제 상황 악화라는 심각한 도전도 밀려오고 있다. 개혁개방 40년을 거꾸로 돌리는 정책 방향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는 가운데, 올해는 5.4운동 100주년, 천안문(톈안먼) 사태 3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 등 민감한 일정들이 줄지어 있다.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원하면서도, 북-미 화해가 급속도로 진행돼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하거나 북한이 미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을 차단하는 차원에서 북한을 관리해왔다.

곧 열릴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대폭 양보해 무역 갈등이 일단 봉합된다고 하더라도, 미-중은 하반기에 미사일 문제를 두고 격돌할 상황이다. 2월2일 미국이 중거리핵전력(INF)철폐 조약 탈퇴를 공식화한 것은 중국(과 북한)을 겨냥하고 있다. 1987년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맺은 이 조약으로 두 나라는 사거리 500~5500㎞의 지상발사미사일의 생산·실험·배치를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미 강경파들은 미국은 이 조약에 묶여 있는 반면 중국 같은 도전자들이 마음대로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반발해 왔다. 탈퇴 선언 6개월 안에 새 조약을 맺지 못하면, 하반기부터는 미국이 동북아에 중거리미사일을 대거 배치해 중국(과 북한)을 겨냥할 수 있다.

북-미 사이에 중재 역할을 맡은 문재인 대통령의 과제는 막중하고, 시간도 많지는 않다. 미국 국내 정치, 미-중 갈등까지 얽힌 복잡한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외교안보팀의 재정비, 회의론이 짙어진 국내 여론과 미국 정치권을 설득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평화의 기회를 이대로 잃어버릴 수는 없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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