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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10 17:52 수정 : 2019.03.11 09:18

조계완
경제팀 기자

출가하기 전 젊은 경제학도였던 법정 스님은 1976년에 쓴 어느 산문에서 “국민총생산(GNP)이 곧 국민총행복량을 뜻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잘살고 못사는 건 추상적이며 외형적인 숫자놀음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내용에 달려 있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인당 국민소득(GNI) 1천달러를 눈앞에 둔 때였다. 그로부터 40년, 우리는 3만1349달러(2018년)에 당도했다. 감히 꿈꾸지도 못했던, 경이롭고 극적인 사건이다.

1인당 ‘3만달러’는 그저 차갑고 건조한 숫자가 아니다. 뭔가 느낌이 온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우리는 대충 알 수 있다. ‘세계 7번째’라는 근사한 수식어 앞에 한결 으쓱한 기분에 젖어들 수도 있다. 분명히 뜨거운 숫자다. 일국 경제의 산출량을 총집계하는 국내총생산(GDP) 통계편제기법이 1930년대에 등장한 이래 윌리엄 데일리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디피를 “상무부가 20세기에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선언했다. ‘문명이 준 선물’로 불리는 지디피 통계는 20세기 경제에서 가장 흥행한 지표였다. 지디피와 국민소득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국민들을 선진국과 개도국으로 구분했고, 전세계의 정치가·정책담당자·투자자·기업가 모두가 이목을 집중하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숫자가 되었다.

이제 ‘1인당’ 3만달러를 보자. 부가가치 창출의 원천은 노동이라는 가르침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면, 3만달러는 모두가 이 한몸 부서져라 일해온 ‘장시간 노동체제 대한민국’이 창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24시간 가동되는 반도체·철강공장뿐 아니라 유흥업소를 위시한 온갖 심야 영업·노동에다 이제는 새벽배송까지 시간과 고투하며 3만달러 대열에 도착했다. 그러나 3만달러가 ‘희소한 자원(노동·자본)의 효율·최적 배분’의 결과로서 풍요·번영을 대변할지 모르나, 소득 분배 상태나 불평등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부터 실업자까지 모든 개인의 소득을 집계한 것일 뿐 시장과 사회의 구조·제도 및 정치적 요인이 주로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계층 간 차별적인 생활수준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흔히 ‘구성의 모순’이라고 부른다. 둘 더하기 둘은 자명하게 넷이 되는 것처럼 개별 주체들의 생산·소득이 총합으로 구성되지만, ‘사회 전체적인 삶의 형편’으로 측정하면 넷 이외의 다른 숫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모순이다. 예컨대 3만달러로 표현되는 ‘경제’가 구성이라면 차별적 생활수준으로 상징되는 ‘사회’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매일 새벽 내 집 뒷문에 우유병을 놓고 가는 그 우유배달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는 당혹감이 사회학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됐다”고 술회했고, 법정은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시대와 사회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관계·집단·공동체를 염려하는 영역이 ‘사회’라는 얘기다.

한국은행은 여전히 지디피와 소득을 계측하고 분기·연간 속보치를 발표할 것이다. 시간·돈·일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아온 여정의 중간기착지로서 3만달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가져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재차 던진다. 숨가쁜 소득 갈망에 익숙해진 우리를 역설적으로 곤경에 빠뜨린다. ‘소득불균형 사회’ 속에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심경으로 다시 4만달러를 향한 경제 혈기를 끈질기게 불태울 것인가? 경제정책의 조준 과녁을 전환하는 용기가 요청되는 때다. ‘저녁이 있는, 위엄있고 평등한 삶’은 우리 가슴 깊숙이 꿈틀거리며 불을 지르는 어휘가 아닌가.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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