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1팀 기자 ‘훌라송’ 합창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학살자’ 전두환이 광주지법에 피고인으로 출두하던 날, 인근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옆 법원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전두환 뉴스’를 접했던 아이들은 바깥 풍경이 궁금했다. 법원 쪽이 가장 잘 보이는 ‘미로쉼터’로 갔다. 놀이기구가 놓여 있는 교실 계단으로 올라간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불리던 ‘훌라송’ 가락에 맞춰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를 외쳤다. 거리에서 이 풍경을 본 다른 학교 교사가 학교로 연락했다. 훌라송은 ‘오월 광주’와 공감대가 큰 노래다. 단순한 선율에 원하는 내용을 가사로 붙이면 묘한 비장함을 불러온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무서움을 떨쳐내고 손을 잡고 저항했다. 원래 아일랜드 민요였던 이 노래는 미국 남북전쟁 때 ‘조니가 집으로 행진해 올 때’로 바뀌어 불렸다. 한국에선 1970년대 대학생들의 집회 현장에 처음 등장했다. 1980년 5월15일 대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모였다가 퇴각한 ‘서울역 회군’ 때도 불렸다. 아이들의 훌라송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면서도 동영상을 본 다른 지역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됐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까지…’라며 혀를 차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잘못하면 또다시 광주가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내가 나를, 그리고 ‘광주’를 스스로 검열한 셈이다. 오월 어머니도, 시민군도, 시민들도 광주의 법정에 출석한 전두환을 보면서 울음을 삼키고 분노를 조절했다. 그날 자기 감정에 솔직했던 것은 전두환과 아이들뿐이었다. 전두환은 “이거 왜 이래?”라며 눈을 부라렸다. 아이들은 사죄 한마디 없는 전두환을 향해 훌라송을 날렸다. 나는 아이들이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처음엔 ‘광주의 기질 탓인가’ 했지만 오해였다. 훌라송은 정직한 역사교육의 효과였다. 전국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엔 5·18 민주화운동이 나온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선 5·18 기념주간 동안 2시간 이상 관련 수업을 진행한다. 광주 첫 혁신학교인 동산초등학교는 교사·학생·학부모가 5·18 교내 행사를 공동으로 주최한다.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훌라송의 멜로디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자신들의 생각을 가사에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훌라송을 불렀던 아이들 또래였던 12살 전재수군은 그해 5월24일 마을 앞산에서 놀다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소년은 죽었지만 발포 명령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시민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계엄군이 스스로 보호하려고 총을 쏘았다는 거짓 ‘자위권’ 논리로 진실을 덮고 있다. 그러면서 수구세력들은 끊임없이 5·18을 난도질하고 있다. 5·18이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남파돼 일으킨 폭동이라는 주장엔 전율이 인다. “기억하지 않으면 국가가 국민을 향해 휘두른 폭력이 반복된다.” 5·18기념재단이 초등학교 5·6학년을 위해 만든 5·18 교재에 나오는 말이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야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공식 5·18 진상보고서가 꼭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도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특별법 시행 6개월째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조사위원 3명 중 2명을 청와대가 자격 미달을 이유로 임명을 거부하자 자유한국당은 재추천 거부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이 가장 바라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을 빼고 여야 4당이 독자적인 조사위원회를 꾸려서는 안 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나서 자유한국당과 대화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유한국당이 재추천한 일부 인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훌라송을 부른 아이들처럼, 현실에 정공법으로 맞서야 한다. daeha@hani.co.kr
칼럼 |
[한겨레 프리즘] 아이들의 ‘훌라송’ / 정대하 |
전국1팀 기자 ‘훌라송’ 합창은 자연 발생적이었다. ‘학살자’ 전두환이 광주지법에 피고인으로 출두하던 날, 인근 동산초등학교 학생들은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이들은 학교 옆 법원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전두환 뉴스’를 접했던 아이들은 바깥 풍경이 궁금했다. 법원 쪽이 가장 잘 보이는 ‘미로쉼터’로 갔다. 놀이기구가 놓여 있는 교실 계단으로 올라간 아이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불리던 ‘훌라송’ 가락에 맞춰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를 외쳤다. 거리에서 이 풍경을 본 다른 학교 교사가 학교로 연락했다. 훌라송은 ‘오월 광주’와 공감대가 큰 노래다. 단순한 선율에 원하는 내용을 가사로 붙이면 묘한 비장함을 불러온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무서움을 떨쳐내고 손을 잡고 저항했다. 원래 아일랜드 민요였던 이 노래는 미국 남북전쟁 때 ‘조니가 집으로 행진해 올 때’로 바뀌어 불렸다. 한국에선 1970년대 대학생들의 집회 현장에 처음 등장했다. 1980년 5월15일 대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모였다가 퇴각한 ‘서울역 회군’ 때도 불렸다. 아이들의 훌라송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그러면서도 동영상을 본 다른 지역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됐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까지…’라며 혀를 차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잘못하면 또다시 광주가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내가 나를, 그리고 ‘광주’를 스스로 검열한 셈이다. 오월 어머니도, 시민군도, 시민들도 광주의 법정에 출석한 전두환을 보면서 울음을 삼키고 분노를 조절했다. 그날 자기 감정에 솔직했던 것은 전두환과 아이들뿐이었다. 전두환은 “이거 왜 이래?”라며 눈을 부라렸다. 아이들은 사죄 한마디 없는 전두환을 향해 훌라송을 날렸다. 나는 아이들이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처음엔 ‘광주의 기질 탓인가’ 했지만 오해였다. 훌라송은 정직한 역사교육의 효과였다. 전국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엔 5·18 민주화운동이 나온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선 5·18 기념주간 동안 2시간 이상 관련 수업을 진행한다. 광주 첫 혁신학교인 동산초등학교는 교사·학생·학부모가 5·18 교내 행사를 공동으로 주최한다. 아이들은 이 과정에서 훌라송의 멜로디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자신들의 생각을 가사에 담아 표현했다. 하지만 5·18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훌라송을 불렀던 아이들 또래였던 12살 전재수군은 그해 5월24일 마을 앞산에서 놀다가 계엄군의 총을 맞고 비명횡사했다. 소년은 죽었지만 발포 명령자는 가려지지 않았다. 시민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계엄군이 스스로 보호하려고 총을 쏘았다는 거짓 ‘자위권’ 논리로 진실을 덮고 있다. 그러면서 수구세력들은 끊임없이 5·18을 난도질하고 있다. 5·18이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남파돼 일으킨 폭동이라는 주장엔 전율이 인다. “기억하지 않으면 국가가 국민을 향해 휘두른 폭력이 반복된다.” 5·18기념재단이 초등학교 5·6학년을 위해 만든 5·18 교재에 나오는 말이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져야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공식 5·18 진상보고서가 꼭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도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특별법 시행 6개월째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추천한 조사위원 3명 중 2명을 청와대가 자격 미달을 이유로 임명을 거부하자 자유한국당은 재추천 거부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이 가장 바라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자유한국당을 빼고 여야 4당이 독자적인 조사위원회를 꾸려서는 안 된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나서 자유한국당과 대화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유한국당이 재추천한 일부 인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훌라송을 부른 아이들처럼, 현실에 정공법으로 맞서야 한다.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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