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12 18:30
수정 : 2006.02.12 18:30
유레카
서양 언론의 마호메트(무함마드) 풍자만화 사태에는 이슬람을 악마같이 보는 편견이 작용한 듯싶다. 그런데 ‘악마 만들기’로 치면 1990년대 발칸반도 분쟁 때만큼 심한 사례도 드물다. 얼마 전 미국에서 출간된 언론인 피터 브로크의 <언론 청소>(media cleansing)는 이를 다룬 책이다. 한 잡지의 서평을 보면, 저자는 언론들이 분쟁 당사자 가운데 유독 세르비아를 악마로 만드는 데 열중했다고 비판한다.
이 책에 나오는 사례 가운데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다. 92년 이슬람 세력에 붙잡힌 세르비아인 보리슬라프 헤라크는 수용소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미국 기자에게 이슬람계 수십명을 학살하고 여러 여성을 강간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여러 언론을 통해 대표적인 학살 사례로 부각됐다. 몇 해 뒤 헤라크는 고문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고, 이 직후 그가 죽였다는 사람 둘이 멀쩡한 것으로 확인됐다. 인터뷰 당시 공포에 떨던 헤라크는 학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데다가 유엔평화유지군 장성에 대해 모략성 발언까지 했고, 그의 동료는 즉각 이 고백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런 정황을 모두 묵살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이 책에 머리말을 써준 전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바인더는 ‘세르비아 악마 만들기’에 맞서다가 발칸 분쟁 보도진에서 빠진 인물이다. 그는 94년 사라예보의 민간인 대상 폭탄 공격이 세르비아가 아니라 이슬람계의 소행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송고했으나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이 기사는 몇 달 뒤 다른 매체를 통해 햇빛을 봤다.
당시 미군 유럽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찰스 보이드는 95년 9월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발칸 사태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현실을 이미지와 분리해야 한다”고 썼다. 이 말은 서양 언론을 접할 때 기억할 지침처럼 들린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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