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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9 18:35 수정 : 2006.02.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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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언론들의 홍보에 힘입어 별로 새롭지 않은 우파 세력이 ‘뉴 라이트’(새 우파)로 자리매김하더니, 이들을 띄우자는 의도가 너무 보이는 ‘뉴 레프트’(새 좌파)라는 용어도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1968년 전세계를 휩쓴 학생혁명 이후 두루 쓰여온 ‘뉴 레프트’가 하루아침에 새 개념을 얻은 꼴이다. 개념이 마구 뒤바뀌는 이런 언어의 혼란은 이념 공세와 맞물려 있다.

이념과 언어의 문제라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카를 마르크스다. 그는 말들이 어떻게 특정 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도록 이념화(이데올로기화)했는지 비판했다. 그는 실생활의 언어와 이데올로기적 언어 사이에 애초 구별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리와 함께, 정신적 활동이 물질적 생산 활동과 독립해 있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 또는 언어, 곧 이데올로기가 생겼다고 한다. 그는 허상을 깨려면 일상 언어로 돌아가야 하고, 궁극적으론 현실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즘 그의 언어관을 높이 평가할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런데 언어철학의 대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비슷한 주장을 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산대 이영철 교수의 논문 ‘비트겐슈타인과 마르크스의 언어관’은 두 철학자의 언어관이 아주 비슷함을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낱말들을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일상적인 사용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 또한 문제의 근원적 치료는 삶의 형태가 바뀌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의 머릿말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친구였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의 비판에서 자극을 받았다고 썼다. 마르크스와의 연결고리를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같으면서도 다른’ 두 철학자가 우리의 혼탁한 언어를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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