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16 18:37
수정 : 2006.05.16 18:37
유레카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역대 최악의 ‘사법살인’으로 기록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8명은 다음날 새벽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 확정을 선고하는 민복기 대법관의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처럼 작았다. 법대에 앉아 있는 대법관들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인혁당 구명운동을 벌였던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전한 법정 모습이다.
81년 4월1일 대법원장 후보 중 한사람인 유태흥 당시 대법원 판사 집을 우병규 정무수석과 손진곤, 박철언 비서관이 방문했다. “조용하게 대화를 나눠보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침에 따른 사실상의 사전 심사였다. 유씨의 답변이 걸작이다. “분단국의 현실에 비춰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 일반 사건에서는 양심적으로 소신껏 독립적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또다른 후보였던 김영준 당시 감사위원은 아예 청와대 정무1수석실에 불려와 “대임이 주어진다면 법관과의 평소 지면을 토대로 유사시에는 압력과 청탁의 방법이 아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토록 하겠습니다”고 다짐했다. 둘 다 권력이 바라는 정답이었지만, 유씨가 낙점됐다.
대법원 판사(대법관) 후보들 ‘면담’은 며칠 뒤 하얏트호텔 밀실에서 진행됐다. 대쪽 판사로 이름났던 이회창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대상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박철언 지음) 그러나 이 대법관은 주심을 맡은 16건 가운데 11건에서 소수의견을 내는 등 소신파의 길을 걸었다.
곧 임기가 끝나는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각 5명의 후임자 고르기가 법조계에서 시작됐다. 후보자 자질과 성향을 놓고 말들이 무성하다. 최소한 오욕의 과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을 제청할 때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을까.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