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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3 20:01 수정 : 2006.05.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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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엔 고려청자 한 점이 놓여 있었다. 조그만 주둥이 밑으로 학 날개처럼 우아하게 펼쳐진 어깨 선, 풍만한 가슴과 늘씬하게 흘러내린 하부의 선. 흰구름 넘실 떠다니고 수십 마리의 학이 날갯짓 하는 비췻빛 하늘.

‘2만원!’ 주인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고. 1935년이었으니 경성에서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쌀 한 가마니가 16원 하던 시절이었다. 흥정은 사라지고 침묵만 흘렀다. 조선인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리다.” ‘식민지 애숭이가 설마 …’ 싶어 불렀는데, 낭패였다. 고려청자 최고의 명품으로 꼽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은 이렇게 간송 전형필에게 넘어왔다.

간송은 장안의 유명한 갑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세창 선생의 영향으로 일본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서울 관훈동에 ‘한남서림’을 세우고 우리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추사의 글씨,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의 그림 등 조선 후기 진경시대 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입증해준 작품들은 여기서 수집됐다.

돈벌이가 아니었으니, 오로지 가치에 따라 값을 치렀다. 훈민정음 원본(국보 70호)이 안동에서 1000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간에게 1000원은 수고비로, 1만원은 물건 값으로 들려 보냈다. 그랬기에 청자 수집가 존 개즈비(영국 변호사)는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66호),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65호)가 포함된 소장품을 모두 그에게 넘겼다. 이렇게 모은 작품은 38년 지은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에 소장했다.

62년 세상을 뜰 때, 억만금 재산은 사라지고 문화재만 남았다. 올해 탄생(1906년 7월29일) 100돌을 맞아 특별전이 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무료다. 여전히 바보처럼 살아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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