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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6 18:05 수정 : 2006.06.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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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대표작 <우신예찬>이 최근 <바보예찬>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광우신(狂愚神) 모리아가 바보의 미덕을 찬양하는 내용이니, ‘바보’가 ‘우신’보다는 낫다. 모리아는 바보를 두 종류로 나눈다. 인간 본래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광대류와, 저 혼자 똑똑한 척하는 현자류가 그것이다. 모리아가 예찬하는 바보는 앞쪽이다. 후자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다.

광대류는 “군주에게 진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군주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을 즐겁게 한다. 진실은 감정을 상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남을 즐겁게 해주는 힘이 있는데, 신은 이들에게만 진실”을 맡기는 무리다. 모리아는 “오직 그들만이 솔직하고 진실하다“고 치켜세운다. 현자류는 “사냥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 노름꾼들, 거짓말쟁이들, 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성인 숭배자, 자기애와 아첨에 매인 시인과 문필가들, 법조문만 쌓아올리는 법률학자들, 논리학자와 수사학자,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개념을 입에 담는 철학자나 신학자, 군주와 제후 그리고 교황과 추기경들”이다. 에라스무스는 두 부류의 구실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하찮은 일을 심각하게 다루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고(현자), 하찮은 것들을 가지고 진지한 일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보다 더 재치 있는 일은 없다.(광대)”

한때 우리에겐 기쁨과 감동을 주던 바보가 있었다. 변호사였지만 만날 노동쟁의 현장이나 좇아다녔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안정적인 정치기반을 포기했다. 떨어질 게 뻔한데도 부산 출마를 고집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중세의 교황 같은 존재가 됐다. 세상에 모르는 게 없었다. 세상은 그가 이끌고 가르쳐야 할 대상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감동 대신 짜증만 주기 시작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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