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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6 17:17 수정 : 2006.02.21 18:38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것은 ‘석유’였다고, 미국의 안보 전문가인 마이클 클레어가 <자원의 지배>란 책에서 주장한다. 연합국이 1940년 독일에, 미국이 이듬해 일본에 석유금수 조처를 취한 것이 확전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독일은 즉시 북아프리카 석유지대를 확보했으나 옛소련의 바쿠 유전지대를 넘보다 전쟁에서 졌다. 일본은 동인도제도로부터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했지만 역시 좌절했다.

우리에겐 석유가 ‘한’의 자원이다. 이승만 정권 때 미국은 이 대통령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마다 원조물자인 석유의 공급을 줄였다. 자동차를 세우고, 공장을 세워 국민의 원성을 사게 한 것이다. 이승만은 “기름 없이 달리는 차를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게 안 되자 아예 자동차를 못 만들게 한 적도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73년 말 1차 석유파동 때는 더 심했다. 아랍국들에 고개를 숙여가며 어렵게 물량은 확보했지만, 74년과 75년 소비자물가는 25%씩이나 뛰었다. 석유를 캐보려고 70년대 중반부터 서남해의 대륙붕에서 30곳 넘게 시추를 해도, “석유가 나오면 한 컵 마시겠다”던 사람들의 소원을 풀어주지는 못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울산 앞바다 동해가스전에서 초경질유가 한 해 2만7천배럴이 나는 ‘산유국’이다. 한해 수입량 8억배럴에 견주면 ‘한 방울’ 정도지만.

철도공사가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을 졸속으로 추진하다 돈을 떼인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가 지난주 사실상 마무리됐다. 거물급 주역은 나오지 않았고, 여야는 이제 특검을 놓고 정치적 득실을 셈하는 중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처음부터 “일은 비록 어긋났으나 석유를 확보하려는 충정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라고 털어놨다면 어떻게 됐을까? 여론이 용서했을까? 진짜 문제는 ‘충정’을 믿어줄 수 있도록 행동해온 사람이 없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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