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적대적 공존 |
미-소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하나의 공식이 있다. 서로 악으로 규정하고 모든 장소, 모든 영역에서 대립하면서도 결코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적이지만 상대가 없어지면 자신도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른바 ‘적대적 공존’이다.
남북한도 그랬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을 명시한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은 지금 봐도 내용이 괜찮다. 하지만 그 직후 박정희 정권은 살벌한 유신체제를 구축했고, 김일성 정권도 내부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이런 적대적 공존의 전통은 냉전 종식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한나라당 후보 관련자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북한 쪽 사람을 만나 “휴전선 부근에서 무력시위를 벌여달라”고 요청한 ‘총풍 사건’이 그 사례다.
미국내 강경파는 지난주 치른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반미 이슬람 근본주의 후보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당선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적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자신들까지 권력을 잃는 일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3년 반 전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꼽은 것도 옛 소련에 맞먹는 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들 나라는 미국이 무너뜨리지 않는 한 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됐더라도 아마디네자드는 악인 것이다.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대화 분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미국 강경파가 목소리를 키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 우익이, 동북아에서는 일본 우파가 이들과 열심히 보조를 맞춘다.
적대적 공존은 냉전의 잔재이자 21세기 지구촌을 위협하는 증오의 전략이다. 유럽은 이미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평화 공존의 틀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미국 강경파의 말이라면 무작정 확산시키는 세력까지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김지석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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