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7 17:00
수정 : 2019.02.27 22:03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분단체제를 지탱해온 근간이다. 그러나 60년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더는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의 전망을 담아내기엔 부족하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현행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은 진작부터 노정됐다.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와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는 협정을 떠받치는 실무기구지만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기능을 상실했다. 군정위는 북한의 참여 거부로 작동을 멈췄고, 중감위는 체코와 폴란드 등 옛 공산권 국가들의 철수로 형해화했다. 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는 그동안 남북간 전면전 발발을 막는 구실을 했다. 그러나 국지 분쟁과 해상경계선을 둘러싼 갈등엔 무력하며,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력 증강 금지 등 몇몇 조항은 실효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정전이 애초 임시 조처였다는 건 협정에서도 드러난다. 유엔군과 북한·중국군의 사령관들이 서명한 정전협정은 그 의도를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3개월 이내에 대표를 파견해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954년 4~6월 스위스에서 정치회의가 열렸으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당시 정치회의에서 매듭짓지 못한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이제 종전선언·평화협정 문제로 옷을 바꿔 입고 새롭게 화두가 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얼마 전 “북-미 사이에 얼마든지 종전선언이 합의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의 종료를 정치적으로 확인하는 종전선언은 애초 남과 북, 미국 등 3자, 또는 중국까지 포함한 4자가 합의해야 할 사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중과 미-중은 수교까지 했고 남북간에도 두 차례 정상회담과 9·19 군사합의 등을 통해 사실상 불가침·종전 선언을 했다. 따라서 북-미만 종전선언을 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종전선언이 실효적으로 완성된다는 논리다.
공교롭게 베트남 하노이는 2006년 11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나와 노 대통령, 김정일이 종전협정에 함께 서명하자”며 종전선언을 처음 제안한 곳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런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항구적 평화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길 기대한다.
박병수 논설위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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