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3 16:31
수정 : 2019.03.13 19:15
1919년 만세시위 사건 100돌을 맞아 이 거족적 항거의 성격을 놓고 한동안 논쟁이 일었다. 초점은 ‘운동이냐 혁명이냐’ 하는 물음으로 모인다. 임형택(성균관대 명예교수)이 <창작과비평>(2019년 봄호)에 쓴 글(‘3·1운동, 한국 근현대에서 다시 묻다’)은 이 사건을 보는 제3의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임형택은 이 문제가 근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을 때만 해도 3·1이 과연 혁명인지 선뜻 공감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문서들을 접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임형택은 이 문서들에 담긴 3·1사건의 정치적 지향이 ‘민국혁명’이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의 발동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라고 한 것이 3·1의 혁명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가 이 혁명을 완성하지 못했고 이 혁명이 내놓은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있다는 점에서는 ‘미완의 혁명’이고 ‘진행형 혁명’이라고 임형택은 말한다.
여기서 임형택이 주목하는 것이 3·1혁명 이후 본격화한 민족해방투쟁 내부의 좌우통합 운동이다. 당시 민족해방투쟁은 좌파 사회주의 계열과 우파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어 갈등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 두 노선을 통합해보려는 노력도 함께 있었다. 임형택은 이런 흐름의 주요 인물로 홍명희와 조소앙을 꼽는다. 신간회 운동을 주도한 홍명희는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중도주의를 주장했고, 조소앙은 민족주의 관점에 서면서도 사회주의 논리를 수용해 삼균주의를 주창했다. 홍명희와 조소앙의 좌우통합 노력은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김규식 같은 중도파 인사들의 좌우합작 노선으로 이어졌다. 3·1혁명이 내건 ‘독립과 자주’를 온전히 실현할 길은 중도파의 좌우통합 노선에 있었으나, 이 길은 패배로 끝나고 남북은 분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반쪽짜리 결손국가 상태가 지속되는 한 3·1혁명은 미완의 혁명을 넘어서지 못하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이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이다. 홍명희와 조소앙, 그리고 해방 정국의 중도파가 보여준 좌우통합, 분단 극복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3·1혁명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임형택의 메시지는 깊이 새겨둘 만하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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