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6.10 16:55
수정 : 2019.06.11 14:21
아라비아반도 북부와 지중해 사이의 땅은 그 풍요로움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는 별칭을 얻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젖줄 삼은 충적평야가 펼쳐진다.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강 사이의 땅), 아랍인들이 알자지라(섬·반도)로 부른, 인류 문명의 발원지다. 한때 에덴동산이었던 이곳은 기독교에 이어 이슬람교가 탄생한 이래 천년이 넘게 피와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는 분쟁 지역이 됐다.
21세기 들어서도 두 차례의 이라크 전쟁을 치렀고, 시리아 내전은 꼬박 8년을 넘겼다. 요 몇달 새 폭음과 총성이 잦아들고 가뭄도 주춤했다. 그런데 모처럼 곡식이 풍성한 들판을 또 다른 불길이 휩쓸고 있다. 5월 초부터 수백곳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해 귀중한 곡물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4일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시리아 북부에서 발생한 폭력으로 수십명이 숨지고 수천 에이커의 경작지에서 곡물이 불탔으며, 최소 30만명의 주민이 집을 등졌다”고 밝혔다. 가축의 목초까지 타버린 땅이 인공위성에서도 잿빛 얼룩들로 확인된다. 화약 무기의 불이 번진 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직이 와해된 채 산발적 저항을 이어가는 이슬람국가(IS)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성명을 냈다. 추종자들에겐 방화의 확대를 촉구했다. “수확기는 아직도 길다. 칼리파의 전사들이여, 너희 앞에 배교자들이 가진 수백만 두남(1두남=약 1천㎡)의 땅에서 보리와 밀이 자란다.” 미국 싱크탱크의 한 연구원은 <워싱턴 포스트>에 “‘우리가 이 땅을 가질 수 없다면 다른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신조”라고 말했다. 유엔은 식량 공급을 ‘전쟁 무기’로 삼는 행태를 용인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곡물 방화가 이슬람국가의 단독 범행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라크와 시리아를 가로지르는 들판은 지난 수십년 새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수많은 세력이 영토권을 주장한다. 주변의 아랍 국가들뿐 아니라 러시아와 미국도 힘겨루기를 한다. 그렇다고 곡물과 경작지를 파괴하는 게 합리화될 순 없다. 국제사회는 제재 대상국에도 식량만큼은 인도적 지원을 한다. 굶주림을 볼모로 삼는 짓은 어떤 이유에서든 야만적 범죄다.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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