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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4 15:38 수정 : 2019.08.04 20:30

‘하이쿠’(俳句)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운문이라 불리는 일본의 정형시다. 5·7·5의 17개 음절로 이뤄지는데 대개 계절이나 자연을 그리는 첫 행으로 시작한다. 짧고 함축적이라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는 게 매력이다. 17세기 문학가 마쓰오 바쇼가 원조로, 한두개쯤 동호회 없는 동네가 드물 정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기획전 ‘표현의 부자유전―그 이후’엔 유일하게 ‘작자 비공개’라 표시된 작품이 있다. “쏟아지는 장맛비 속/ ‘9조 지키라’는/ 여성들의 데모”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작품 ‘9조 하이쿠’는 지난 몇년간 일본에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야기는 2014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에 사는 70대 여성은 도쿄 긴자에 갔다가 우연히 빗속에서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을 반대하는 여성 시위를 보게 됐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부터 노인, 젊은이들의 모습에 감동받은 그는 동호회에서 하이쿠를 읊어 1위에 뽑혔다. 그런데 이 동호회가 선정한 하이쿠를 매달 소개해온 미하시공민관(주민회관)이 돌연 게재를 거부하며 코너를 뺀 채 소식지를 발행했다. “여론이 나뉜 사안으로 정치적 중립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몇번의 항의에도 시가 방침을 바꾸지 않자 다음해 이 여성은 시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다. 시민응원단과 함께 저명한 학자와 변호사들이 합류한 재판의 쟁점은 표현의 자유 침해와 국민의 학습권을 도와야 할 공민관의 일탈 여부였다. 지난해 말 일본 최고재판소는 표현의 자유 침해 자체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위법성을 인정해 원고에게 5천엔(5만6천원)을 배상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얼굴과 이름은 공개하지 않은 작자는 “침묵하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 작은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사회를 지키기 위해 한걸음 내디뎠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전쟁과 무력행사의 포기 및 군대의 보유 금지를 명기한 일본의 헌법 9조 1항과 2항은 평화헌법의 핵심이다. 아베 정권이 개헌을 공공연히 공언하지만 엄연히 일본의 현행 헌법이다. 그 헌법을 지키자는 평범한 시민의 문예작품조차 ‘중립성’에 저촉된다고 몸 사리는 시의 행태는 아베 정권에 종속화된 행정의 현주소처럼 여겨졌다. 4일 소녀상과 함께 ‘9조 하이쿠’는 또다시 전시장 가벽 안에 가둬졌다. 그래도 전시작품 철거 중지를 요구하는 일본 내 온라인 서명자가 몇시간 만에 8천명에 육박하는 등 ‘침묵’하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영희 논설위원 dora@hani.co.kr

'표현의 부자유전-그 이후' 홈페이지에 실린 '9조 하이쿠' 작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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