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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9 18:43 수정 : 2019.09.09 18:58

미국 출신의 세계적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88. 이 소식은 다음날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에 유족이 짤막한 글을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에선 2일 월요일 오전(이하 한국시각)이었다. 월러스틴은 개별 국가 단위를 넘어 중심부-주변부의 비대칭적 분업체계로 세계 자본주의 구조와 역사를 분석한 논쟁적 저서 <근대 세계 체제>(1~4권)로 사회과학계의 세계화 담론을 주도한 석학이다.

‘팩트 체크’(사실 확인)에 바빠졌다. 국내 최초 단독 보도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은근히 있었다. 인터넷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란 영문 이름을 샅샅이 검색했다. 이상했다. 주요 뉴스통신사 단 한 곳에서도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시엔엔(CNN), 비비시(BBC) 등 영어권 주요 매체들도 마찬가지였다.

외신 보도가 전혀 없진 않았다. 맨 먼저 이란 뉴스통신사가 속보를 띄웠다. 첫 한 문장에서만 건조하게 “미국의 세계체계 분석가 월러스틴이 88세로 사망했다”고 전했을 뿐, 이후론 그의 ‘세계체제론’ 이야기였다. 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와 터키,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몇몇 매체도 비슷한 보도를 내보냈다. 국제 사회학회 두 곳의 누리집엔 추모 글이 올라왔다.

이 정도면 ‘확인’된 걸까. 미심쩍었다. 어디에도 고인의 정확한 사망 시각과 원인, 장소 등 구체적 정보가 없었다. ‘가짜 뉴스’를 의심해보기도 했다. ‘팩트(사실)’이거나, 적어도 그렇다는 확신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쓰기 힘든 기자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여러 정황과 검색 결과를 토대로 “팩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공교롭게도 <한겨레>와 <경향신문>이 이날 낮 국내 언론으론 처음으로 거의 같은 시각에 온라인 뉴스 속보를 띄웠다. 한겨레는 1판 지면에도 자리를 잡고 기사를 출고했다. 매주 금요일치 별지 섹션 ‘책과 생각’ 지면을 만드는 책지성팀에선 발빠르게, 월러스틴의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전문가 기고를 싣기로 하고 원고를 청탁해 두었다.

그런데 사망 소식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초조함은 커지고 확신은 흔들렸다. 30여년 전 <조선일보>가 호외까지 낸 ’김일성 피격 사망’ 단독 기사가 세계적인 오보로 밝혀진 전례도 떠올렸다. 지면 게재를 유보하자는 데스크 의견을 논박하지 못했다. 온라인에서도 몇 시간 만에 기사가 빠졌다. 발 빠르게 품 들인 보도가 ‘오보’ 우려로 철회되는 것은 씁쓸했다. 월러스틴 사망 ‘사실’은 다음날 밤 경향신문 미국 특파원이 확인했다. 다른 언론사들은 그 뒤에야 몇 군데에서 기사를 냈다.

진짜 씁쓸한 건 따로 있다. 내가, 혹은 한국의 많은 국제뉴스 기자들이 사실을 ‘확인’하는 기준이 뭐였나? 평소 국제 뉴스를 쓰면서, 중동이든, 남미든,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이른바 제3세계 지역 뉴스는 팩트 파악뿐 아니라 시각 차이를 공부하기 위해서도 최대한 현지 언론을 챙겨보고 인용하려 애써왔다. 독해할 수 있는 외국어가 영어뿐이라는 한계가 뚜렷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됐다. 영어라는 언어의 위력도 매번 느낀다.

그런데, 월러스틴 사망 보도에서 내가 사실을 ‘확인’하는 기준이 뭐였나? 영미권 주요 언론의 보도 여부였다. 그 몇 군데서만 보도했다면, 다른 언어권의 매체는 검색해보지도 않은 채 ‘확인’됐다고 여겼을 것이다. 관성, 편견, 시차 등을 핑계 삼을 수 있겠다.그러나 진짜 이유는, 평소 경계심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순간에,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 영어 원조국들의 보도에 기대려던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괴감이 들고 부끄러운 까닭이다.

조일준 국제뉴스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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