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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2 16:37 수정 : 2019.09.22 19:06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은 본래 배봉산(서울 전농동, 조선시대 당시엔 경기 양주) 기슭에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즉위 13년 만인 1789년 아버지의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당시엔 수원도호부 소속)로 옮긴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자리는 현재 ‘융건릉’으로 꾸며져 있다.

정조 당시엔 지금의 융건릉 자리가 수원도호부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임금의 아버지 무덤이 들어섬에 따라 도호부의 중심지는 지금의 수원성(수원 화성)으로 바뀌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한 4년 뒤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화성(華城)이란 행정 지명이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실마리이다. 화성이란 지명은 왕의 아버지 능을 이장한 지역명인 동시에, 능을 멀찍이서 지키는 성곽의 이름이었다.

수원과 화성이란 지명은 한참 동안 혼용됐다. 정조 사후 지역은 수원, 성곽은 화성이라고 일컬어지면서 수원의 이름이 복원됐다. 능은 화성시에, 성곽은 수원시에 있는 것을 두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화성(시)에는 화성(성곽)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화성은 수원과 밀접하게 얽혀 한때 합치기도 했다가 1949년 군으로 독립했고, 2001년 시로 승격됐다.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지닌 화성 지역에서 1986~1991년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진 탓에 지역명이 잔인한 네 글자와 연결돼 상기되기 일쑤였다. ‘단일 사건 최대 규모’ 수사를 불러온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꼽힌 이 일의 유력한 용의자가 33년 만에 유전자 분석을 통해 특정됐다는 소식에 화성이 다시 소환돼 세간에 오르내리게 됐다.

화성이란 지명의 뿌리는 <장자>의 ‘천지’편에 나오는 고사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고 화성시는 소개하고 있다. 화(華)라는 지방의 제후가 요(堯) 임금에게 부귀, 장수, 다산을 기원했다는 의미란다. 정조는 이를 ‘백성은 왕실의 안녕을, 임금은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뜻으로 이어받아 화성이란 이름을 따왔다.

화성 사건의 여파로 직접적인 피해자나 유족은 말할 것도 없고, 담당 경찰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과도한 스트레스로 숨지는 일까지 있었다는 아픈 후일담이 이어진다. 사건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선 일을 계기로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고 지명의 본래 향기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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