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21 18:19
수정 : 2015.05.21 18:19
1972년 미국-중국의 역사적 화해는 실용외교의 산 교과서다.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이념을 뒤로하고 손을 맞잡았다. 20년 넘게 적국이었던 미-중의 화해를 가능케 한 것은 1년여간의 비밀외교였다. 비밀특사 임무를 띠고 1971년 7월 베이징을 방문했던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저서 <중국 이야기>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키신저 특사팀이 당시 대외적으로 알린 공식일정은 사이공, 방콕, 뉴델리, 그리고 라왈핀디(파키스탄 북부 도시)를 거쳐 파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리에 가기 전 이틀간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다. 언론에는 키신저가 몸이 아파서, 라왈핀디의 히말라야 피서지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다고 알렸다.
키신저는 당시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만나 대만 문제 같은 민감한 이슈들에서 타협을 하고 결국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합의했다. 양쪽은 공동발표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거쳤다. 양쪽 모두 자기네보다 상대방이 안달이 난 것으로 보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표현이 나왔다. 저우언라이가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닉슨 대통령의 공공연한 열망을 익히 알고 있었던지라” 닉슨 대통령에게 초청을 했고, 닉슨이 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어느 쪽이 먼저 닉슨의 중국 방문 얘기를 꺼냈는지 아리송하게 돼 있다. 양쪽 모두 먼저 머리를 숙이고 협상을 간청했다는 내부의 비판을 피하고자 한 데서 나온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는 적대 국가들이 화해의 길로 나가는 데는 얼마나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접근법은 미-중 간 화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들어서 미얀마·쿠바와 관계 개선을, 그리고 이란과 핵 협상을 시작할 때 모두 1년 안팎의 비밀협상 단계를 거쳤다. 오바마 대통령은 모두 백악관 측근과 국무부 고위 관료를 비밀특사로 내세웠다.
이것은 미국이 투명성을 등한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랜 기간 적으로 살아온 국가들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래서 최고통치자의 신임을 받는 측근을 특사로 임명해 서로의 의도를 확인하고, 협상이 가능한 부분들을 털어놓고 얘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협상할 때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키신저는 “투명성은 아주 중요한 목표이지만 좀 더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건설하는 역사적 기회 또한 너무나 긴요한 일”이라고 비밀협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남북관계가 박근혜 정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대화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왜 숙청했는지, 그리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방북 허가를 왜 갑자기 번복했는지 등에 대해 우리 정부 그 누구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과거엔 중국이 그나마 북한과 고위급 접촉 채널을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도 안 된다. 이런 비정상적 상황의 장기화는 남북 화해를 어렵게 함은 물론이고 정세 관리 측면에서도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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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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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방법론적으로는 ‘비밀회담은 없다’는 박 대통령의 원칙 탓이 크다. 퍼주기 논란을 의식한 태도이지만, 이는 국제외교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것이다. 이래 가지고는 남은 임기 동안 남북 화해는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 때는 그나마 정상회담을 시도라도 해봤지만, 지금 정부는 그마저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걸 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비밀회담이 어렵다면, 공개적으로 특사를 평양에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이희호씨의 방북을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다.
박현 워싱턴 특파원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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