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12 20:45
수정 : 2016.05.12 20:45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외교 관련 발언을 놓고 씨름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지만, 미로에 갇힌 느낌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의 발언을 분석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을까, 회의가 든 적도 있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며 비웃지만, 트럼프는 김 위원장을 몇수나 뛰어넘는 공력을 지니고 있다.
트럼프의 발언에서 비교적 일관된 흐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국제분쟁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는 고립주의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정책들도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비개입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게 보면 ‘트럼프 외교 노선’이 전혀 생뚱맞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고립주의와 충돌하는 발언도 거리낌없이 한다. 유세장이나 텔레비전 토론에서의 발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나름대로 준비하고 정제해 발표한 지난 4월 말 외교연설에도 아귀가 맞지 않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군사적 개입을 자제한다고 하면서도 국방은 강화하겠다고 말한다.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인 ‘이슬람국가’를 곧바로 없앨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도, 군사적 수단이 아닌 ‘철학적 투쟁’을 통해 하겠다고 한다.
트럼프 발언에서 나타나는 모순된 지점들은 그가 결코 분열적 사고를 가졌거나 무식해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일반적 정서가 그렇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유명 연구소인 ‘퓨리서치 센터’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57%는 미국이 국내 문제 해결에만 신경 쓰기를 원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 문제 해결을 도와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37%에 그쳤다. 국제주의보다는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미국인들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여론조사에서 이와 반대되는 흐름도 공존하고 있다. 글로벌 위협에 맞서 국방비를 증액해야 한다는 미국인은 35%를 차지했다. 금융위기 여파가 절정이던 2010년엔 고작 13%만이 국방비 증액에 찬성했다고 하니, 가파른 상승세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50%를 기록한 이후 최고치라고 연구소는 소개했다.
트럼프는 양립할 수 없는 견해를 가진 미국 유권자층을 모두 끌어안으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분열적으로 비친다. 그에게 유일한 황금률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선 철저하게 인기에 영합해 많은 표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어떤 감언이설도 할 수 있고, 하루아침에 말바꾸기도 할 것이다.
또한 그가 아무리 자신의 말을 번복해도, 주류 언론이 아무리 그 점을 비판해도, 평범한 미국인들의 여론은 그가 ‘강한 미국’을 재건할 메시아인 양 무척 관대하다. 인기 영합주의와 강한 맷집, 여기에 트럼프의 무서움이 도사리고 있다.
얼마 전 트럼프가 양복을 입고 큰 포크를 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토록 ‘증오’하던 멕시코의 대중음식 타코볼을 먹으며 “히스패닉 사랑해요”라고 적힌 사진을 공개했을 때, 조금 소름이 끼쳤다. 증오가 순식간에 사랑으로 바뀌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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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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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무섭다. 그에게 대외정책의 철학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명분을 얘기할 자리조차 없어 보인다. 지지율 제고를 위해서라면 대외정책쯤은 헌신짝처럼 버리거나 바꿀 것 같다. 무엇보다, 강대국 간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다른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할 가능성도 이전 행정부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절반의 확률까지 치고 올라온 ‘트럼프 대통령’이란 현실은 생각보다 엄중해 보인다.
이용인 워싱턴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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