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린속나의 연인
1991년 어림은 정말 영화에 파묻혀 산 시간이었다. 그 시절은 막 극단에 들어가서 연극을 한다 어쩐다 열심히 ?아 다니던 때였는데, 그야말로 한 달에 세종대왕 한 두 장조차 손에 쥐기 힘들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늘 달고 사는 처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이수인 선배가 환한 얼굴로 와서는 영화도 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기가 막힌 알바가 생겼다면서 신청자를 받겠다는 것이다. 비디오 한 편에 원고지 5매 정도 평만 쓰면 된다는 선배의 말은 사뭇 복음이었다. 극단에서 너도나도 신청자가 쇄도했고 신청자 중에서 필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필자로 선정(?)되었다. (그 중엔 지금은 스타가 된 정진영 선배도 있었다!)하지만 일은 정말 어려웠다. 욕심껏 분량을 할당 받아오긴 했는데 비디오를 하루에 10편 넘게 봐야하는 것은 육체노동이었다. 게다가 본 영화에 대한 상큼발랄한 평가를 원고지 5매 안에 구겨 넣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평론쓰기 숙제였다.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눈이 시뻘개지도록 비디오를 보며 며칠은 착실했는데 난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 배우 때문에 나머지 비디오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영화는 <열정의 록큰롤>이란 촌스러운 제목을 달고 있어서 처음엔 무시하고 뒤로 미뤄뒀었는데, 어머나! 그 섹시한 피아노 사운드에 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온 몸과 엉덩이까지 동원해서 피아노를 쳐 대던 그, 데니스 퀘이드의 연기도 압권이었지만 난 그의 어린 신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천사같기만 한 명징하고도 새콤한 그녀는 첫날밤 장면에서도 순진무구하기만 했다. 미성년자의 성행위 묘사라고 해서 극장 검열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저주하며 그 소녀의 귀엽기만한 눈웃음에 헤죽대던 나는, 그 순간 그녀의 골수팬이 되고 말았다. 그 가슴설레는 새침함이라니! 그녀의 이름은 위노라 라이더였다.
데뷔작인 <비틀쥬스>에선 검은색이 황홀하리만큼 잘 어울렸고, <가위손>에선 그야말로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소녀였다. <헤더스>나 <청춘 스케치>에서는 반항기 가득한 고등학생으로 나와 그야말로 폭발하는 젊은 열기를 보여주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그녀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는 듯 보였다. 눈에 번진 마스카라에서도 세파나 풍상을 읽을 수 없었으며, 그저 그녀의 무구한 영혼이 놀라운 치유력으로 사춘기의 아픈 정서적 상처들을 치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순수의 시대>와 <아메리칸 퀼트>에선 그녀의 열기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성숙해가는 여인의 향기가 가슴을 더욱 설레게만 했다.
|
김성수(극작가, 연출가, 예술극장 나무와물 대표)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