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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11 17:13 수정 : 2007.04.17 11:49

‘비처럼 음악처럼’ 풍미한 1980년대 가요계의 디오니소스 김현식

한국 팝의 사건·사고 (89) 김현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술의 신이면서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터넷 검색 찬스 없이 맞추는 사람은 흔치 않다. 흰소리 같지만, 1980년대 가요계에서 김현식만큼 디오니소스란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를 디오니소스에 비유할 때, 외로움을 잘 타고 사랑을 갈구한 그에게 ‘꿀’이면서 겨우 서른두 살에 그를 세상과 작별하게 만든 ‘독’이었던 술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는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대지를 비옥하게 일군 풍요의 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현식(1958~1990)은 1980년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당신의 모습>을 타이틀로 한 독집으로 데뷔했다. 이장희 제작, 사랑과 평화의 연주로 만들어진 이 음반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고 그는 다시 밤무대 생활로 돌아갔다. 4년 뒤 김현식은 동아기획과 손을 잡고 두 번째 음반을 내놓았다. 카페에서 찍은 감상적인 분위기의 음반 표지사진과 호응하는 애상적인 트로트 풍의 발라드 <사랑했어요>가 다운타운가에서 인기를 얻었고, 서정적인 전반부에 이은 폭발적인 클라이맥스가 압권인 <어둠 그 별빛>은 오래도록 숨은 명곡으로 손꼽혔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미미하기만 했다.

김현식이 인기 가수로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3집을 발표한 1986년 말부터였다. <사랑했어요>의 후속곡 같은 느낌의 <빗속의 연가>가 엘피 앞면 머릿곡으로 전진배치된 것은 기획사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정작 히트한 곡은 엘피 뒷면 첫 곡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다. <비처럼 음악처럼>은 라디오 전파를 자주 타며(지금도 비오는 날 선곡 1순위다) 김현식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비처럼 음악처럼> 때문에 3집을 산 이들은 대부분 그의 팬이 되었다. 고른 완성도와 높은 짜임새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록(<눈 내리던 겨울 밤>), 포크(<슬퍼하지 말아요>), 블루스(<비오는 어느 저녁>), 재즈(<쓸쓸한 오후>) 등 다양한 스타일의 곡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누구라도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3집은 보다 세련된 질감과 일관성, 안정감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3집이 세련되고 정돈돼 보인 데는 김현식이 자신의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음반을 빚어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전작들처럼 일급 세션진의 연주 대신 자신이 주도하는 그룹에 의한 ‘완벽하진 않지만 유기적인’ 연주로 자신의 음악적 문법을 정립하여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 1970년대 풍 잔재와 느낌이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그룹에 고 유재하가 키보드 연주자로 재적한 바 있고(<가리워진 길>이 수록된 건 그 때문이다), 뒤에 2인조 봄여름가을겨울로 독립하는 김종진과 전태관, 빛과소금을 결성하게 되는 박성식과 장기호가 멤버였다는 사실은 김현식의 팬이라면 ‘상식’이다. 또 이 음반이 들국화 데뷔작에 이은 동아기획(넓게는 신촌 언더그라운드)의 ‘연속타자 홈런’이었다는 점은 그 시대를 경험한 음악애호가라면 상식일 것이다.

정리하면 3집은 김현식이 제대로 된 자신만의 ‘음악적 말문’을 떼기 시작한 첫 작품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멀리는 작곡가 손석우(<이별의 종착역>)를 뿌리로 하여 증식과 이식과 변이를 거치며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팝의 여러 갈래들이 김현식이란 필터를 통과하며 새로운 한 갈래로 태어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걸 단지 ‘김현식 표 한국적 발라드’라고 부른다면 인색한 평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질문은 계속된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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