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1 19:03
수정 : 2007.04.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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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1986) - 1집 Too Fast Too Loud Too Heavy - 앞(수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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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92) 유현상과 백두산
유현상이란 음악인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까. 1990년대 이후 <여자야> <갈 테면 가라지> 등을 구성지게 부른 트로트 가수? 1980년대 후반 이지연 등 신인가수를 발굴한 음반제작자 겸 매니저?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이지연 노래), <성냥갑 속 내 젊음아>(도원경 노래) 등을 만든 작곡가? 1980년대 중반 그룹 백두산을 결성하고 이끈 헤비메탈 1세대 보컬리스트? 요즘의 박태환의 인기를 능가하던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해서 여성지와 스포츠신문을 장식한 가수?
그 모두가 음악인 유현상의 디엔에이를 이루는 요소다. 유현상을 메탈 보컬리스트로 숭배했던 이들에게 그가 이지연의 틴 아이돌 팝 곡들을 작곡하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일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지만, 그가 록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로 오랫 동안 무명 밴드를 거쳤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룹 백두산 이전에 트로트 음반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사실 역시 금시초문일 공산이 크다.
최이철(사랑과 평화), 이건태(위대한 탄생) 등 동료 음악인들이 입 모아 증언하듯, 유현상은 1970년대 미군을 상대로 한 이태원 클럽가에서 기나긴 무명의 로커 시기를 보냈다. 라스트 찬스, 사계절, 템페스트, 사랑과 평화는 그가 기타리스트로, 보컬리스트로 내공을 다진 수많은 밴드 중 일부일 뿐이다. 트로트와 록이 묘하게 혼합된 솔로 앨범 <사랑의 강>(1985)에서 김도균을 세션 기타리스트로 픽업한 일이 그룹 백두산 결성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사실은 이후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의미심장하다.
1986년은 헤비메탈 4인방(시나위, 백두산, H2O, 부활)으로 불린 밴드들의 데뷔작들이 쏟아진 해이다. 그해 백두산 역시 1집 를 발표했다. 서정성과 장중함을 갖춘 <어둠 속에서>를 히트시킨 이 음반은 한국 헤비메탈의 시금석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건전 발랄하기 그지없는 가사와 무드(<우리의 것>)와 한춘근의 타미 앨드리지 풍 드럼 솔로(<뛰어>)와 하이톤의 샤우팅(<말할 걸>)이 공존하는 음반이었다.
이듬해 내놓은 2집 에 열광했다. 하지만 백두산 역시 다른 밴드들처럼 해체의 수순을 피하지는 못했고 영광의 시기는 1986~87년의 짧은 2년으로 그쳤다.
백두산은 메탈 4인방 밴드 중 가장 격렬한 음악과 무대 매너를 보여준 밴드다. 단신에, 30대를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웃통을 벗어젖히고 무대를 누비던 유현상의 퍼포먼스는 당시 록 마니아라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다소 희화화된 이미지로 추억되는 측면이 있다. 캔의 배기성이 더러 연예프로그램에서 그 시절 유현상과 백두산을 흉내 내 좌중을 웃기던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 줄 알 것이다. 웃긴가? 그렇더라도 그것 역시 한국 록의 나이테의 하나다. 씁쓸한가? 아직 메탈 시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시작되지도 못했다. 다만 그때는 무겁고 다소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웠을지라도 절실하고 절박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슬프지만 진실’이다.
이용우/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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