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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29 17:38 수정 : 2007.04.29 17:38

시나위 1집 음반 <헤비 메탈>(1986년)<한겨레> 자료사진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95) 시나위

예나 지금이나 10대들은 지옥 같은 입시체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범생’이든 ‘날라리’든 예외는 없다. 이런 10대들에게 음악은 늘 피안으로 가는 티켓이었다. 1980년대 중반 10대들이 주로 이용하던 음악 티켓은 유로댄스음악과 헤비메탈이었다. 그 시절 여학생들은 신시사이저 팝과 유로댄스음악으로 갑갑함을 풀었고, 남학생들은 전기 기타로 상징되는 록 음악, 특히 헤비메탈에 목숨을 걸었다. 물론 다 그랬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교실의 ‘문화 오피니언 리더들’ 대부분이 그랬다고 얘기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 중·고등학교를 다닌 남성이라면 어제 일처럼 생생할 것이다. 쉬는 시간이면, 일명 마대자루를 마이크나 전기기타 삼아 ‘되도 않는’ 괴성을 질러대던 녀석들(또는 자신의) 즉석 공연 모습을. 또 워크맨 볼륨을 끝까지 올려 귀가 터져라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던 기억을 말이다.

오지 오스본이니 주다스 프리스트니 모틀리 크루니 하는 영미산 ‘중금속 음악’에 경도된 이들에게 1986년 봄 발매된 시나위의 데뷔작 〈헤비 메탈〉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임재범의 거칠고 힘찬 보컬과 리더 신대철의 강력하고 현란한 기타 연주는 사운드의 강도만큼이나 큰 파장을 낳았다. 출중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외국산과 비교한다면 완벽한 대체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새 시대 한국 록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곧 10대 메탈 키드들의 송가가 되었고 라디오 인기 차트에도 올랐다. 강종수(드럼)의 빼어난 가사와 절정의 헤비 사운드를 결합한 ‘남사당패’는 즉각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가치를 인정받았다. 메탈 발라드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와 연주곡 ‘1월’은 감정의 외적 분출로 채워지지 않는 서정적 간극을 채워주었다.

신대철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가 김종서(보컬), 강기영(베이스), 김민기(드럼)로 교체된 후 녹음한 2집 〈다운 앤 업(Down and Up)〉도 큰 호응을 얻었다. 타이틀곡 ‘새가 되어 가리’와 발라드 ‘해 저문 길에서’는 김종서의 하이톤의 음색이 대변하듯 이들이 좀더 밝고 깔끔한 ‘엘에이(LA) 메탈’ 스타일로 변모했음을 드러냈다.

시나위의 이후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대로다. 멤버 교체, 활동 중단, 음악 스타일 변화의 반복을 겪으면서도 ‘그후로도 오랫동안’ 현재진행형으로 남은 사실,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 김바다 등을 배출한 한국 록의 ‘명가’라는 ‘자랑스럽지만 안쓰러운’ 수식어 말이다.

시나위의 등장은 백두산 부활 H2O 등의 음반 제작을 부추기며 메탈의 저변을 넓힌 강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낙원동 파고다극장과 이태원 록 월드 같은 후미진 유사 공연장과 어둑한 뮤직비디오 감상실을 전전하며 단순히 카피와 감상에 머물던 스쿨 밴드들과 메탈 키드에게 자작곡의 필요성과 자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요컨대 시나위는 1980년대 후반 한국 메탈의 진정한 발화점이었던 것이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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