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17 19:40
수정 : 2007.05.1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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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 지예 등 신세대 작사가들이 참여한 변진섭 2집 ‘희망사항’(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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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97) 변진섭과 여성 작사가들
이문세가 고품격 발라드의 지평을 확립했다면, 그 뒤를 이은 변진섭은 발라드를 세련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변진섭의 발라드 왕국’이 그 혼자만의 힘으로 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7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으며 출발한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신예 작곡가들이었다. 이문세에게 이영훈이 있었다면, 변진섭에게는 하광훈, 지근식, 윤상, 노영심 등이 있었다.
하광훈과 지근식의 공조 체제가 변진섭표 발라드의 주요 뼈대를 이루었지만, 여기서는 변진섭의 2집에 곡을 실은 윤상에 대해서만 잠시 이야기해 보자. 이런저런 무대 뒤에서 전전하다가 김현식의 ‘여름밤의 꿈’(1988)으로 작곡가로 데뷔한 그는 손무현이 주축이 된 김완선의 백밴드 실루엣을 거치며 변진섭, 황치훈, 김민우, 강수지 등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된다. 뒷날 본인의 음반도 발표하며 가수 겸 작곡가,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그에 대한 이후 활동상 소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어쨌든 변진섭은 이문세에서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발라드 계보의 징검다리였다. 단순화시켜 비교하면, 이문세의 발라드가 시적 서정에 풍성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충만했다면, 변진섭의 발라드는 밝고 경쾌한 사운드에 깔끔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주효했다. 힘이 실린 열창형 창법(때로는 ‘꺾기’ 창법)이 이문세 목소리의 묘미라면, 변진섭은 물 흐르듯 감미롭고 유려한 음색으로 사랑의 달콤 쌉싸래함을 노래했다.
(그의) 발라드가 (당시 소녀들에게) 부여한 통속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동은 가사에서도 뚜렷하다. 이는 두 여성 작사가 지예, 박주연의 공적이 크다. 탤런트 출신이자 가수로도 활동한 지예는 변진섭 1집에서 하광훈 곡(‘홀로 된다는 것’ 등), 2집에서 윤상 곡(‘로라’ 등)과 조우했다. 박주연도 〈우리 노래 전시회 1〉(1984)에서 ‘그댄 왠지 달라요’로 데뷔했지만 변진섭 2집의 ‘너에게로 또다시’(하광훈 작곡) 등을 비롯해 김민우의 ‘입영 열차 안에서’(윤상 작곡),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 등 발라드 히트곡 작사가로 명성을 떨쳤다.
세칭 ‘신세대 여성 작사가’들은 (변진섭에게도 곡을 준) 신진 작곡가들과 느슨한 공조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 말, 1990년대 초중반, 발라드 황금기의 주역이 된다.(가령 윤상의 앨범에는 ‘이별의 그늘’(박주연 작사), ‘잊혀지는 것들’(지예 작사) 등 윤상이 두 여성 작사가와 호흡을 맞춘 곡들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쓴 노랫말의 매력은? 사랑해서 기쁘고 이별해서 슬프다는 식의 추상적 모티브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산문체와 신선한 구어체의 중도적 화법으로 내면의 정경을 정밀 묘사했다. 남성 가수들이 부른 노래 속의 남성 화자는 진짜 남성의 모습이라기보다 여성이 바라본 남성상, 여성이 상상해낸 산물에 가까울지 몰라도, 사랑과 이별에 이르는 감정과 정황들이 섬세하고도 친근하게 포착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사가들은 발라드 가사의 한 정석을 마련하며 발라드 시대를 만개시켰음은 물론 발라드의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도 명확히 드러냈다.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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