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5.24 22:06 수정 : 2007.05.24 22:06

이상은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99) 이상은과 신해철

‘58년 개띠’란 말처럼, 속칭 ‘쌍팔년도’ 하면 짠한 느낌이 드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도 벌써 20년이 다 된 일이다. 지겹겠지만, 대학가요제 얘기를 한번 더 해야 할 듯하다. 1977년 시작한 대학가요제의 약발이 다했다고들 수군거리던 그때, 걸출한 스타 두 명이 탄생했다. 강변가요제의 히로인 이상은과 대학가요제의 히어로 신해철 말이다.

예의 한여름 남이섬에서 열린 1988년 강변가요제는 이수만(!)과 정혜정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껑충한 키에 선머슴 같은 이상은이 탬버린을 들고 율동을 하면서 〈담다디〉를 부르던 장면은 단연 그날의 걸작이었다. 금세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를 지닌 〈담다디〉에 대상이 돌아갔지만, 사실 그 무대에는 훗날 가요계를 풍미할 쟁쟁한 가수가 여럿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의 이상우가 금상을, 〈한번만 더〉의 박성신이 장려상을 받았고, 〈한 송이 저 들국화처럼〉의 박광현과 〈유혹〉의 이재영도 이 무대에서 데뷔했다.

신해철
세밑에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대학가요제의 스포트라이트는 마지막 참가자 무한궤도의 차지였다. 늘 마지막에 무대에 오르는 조용필처럼(실제 조용필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다!), 무한궤도는 현란한 조명에 걸맞은 화려한 사운드로 압도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강력한 대상 후보 주병선(뒷날 〈칠갑산〉을 부른 바로 그)을 밀어내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풍의 신시사이저가 돋보이는 〈그대에게〉는 동시대 헤비메탈이 충족시키지 못한 새로운 대중적 록의 가능성을 꽃피웠다.

무엇보다 가요제 이후 이상은과 신해철은 아이돌 스타로 우뚝 섰다. 소년 같은 중성적 매력을 보여준 이상은은 이듬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할꺼야〉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여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귀공자 스타일에 명문대생이란 후광을 더한 신해철 역시 무한궤도의 데뷔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1989)는 물론, 솔로로 나선 뒤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1990)와 〈재즈 카페〉(1991)를 계속 히트시켰다. 하지만 이상은은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외유하며 아이돌 세계와 작별을 고했으며, 신해철은 넥스트를 결성해 거칠고 장중한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세계로 이탈했다.

그 뒤 신해철과 이상은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며 대중음악계를 호령했다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다. 여기서는 음악세계가 서로 달랐지만 이들이 꽤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점만 확인하자. 대학가요제로 데뷔해 아이돌 스타로 인기를 누리다 자의식 강한 ‘아티스트’로 거듭났다는 점 말이다. 뒤에 둘 다 철학자의 이름을 딴 예명과 밴드명으로 활동한 적 있다는 사실은 사소하지만 흥미롭다. 이상은은 ‘리채’(Lee-Tzsche)로, 신해철은 ‘비트겐슈타인’으로 활동했으니 말이다. (부모의 성에서 한 자씩 따온 리채의 영어철자는 니체와 무관하지 않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