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31 21:11
수정 : 2007.05.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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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의〈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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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100) 김창완의 우울한 계절 ‘혹은 1980년대 산울림
1984년 10집 음반을 발표할 무렵부터 산울림은 실질적으로 ‘김창완이 혼자 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친동생들인 김창훈과 김창익은 이후 직업적인 음악활동에서 멀어져 갔는데, 김창훈은 필자들과 인터뷰하면서 그 이유를 “배고파서”라고 간략하지만 뚜렷하게 말한 바 있다. 명문대 졸업장을 받은 아들 3형제 모두가 연예계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부모들이 끝까지 대범하기를 기대하기란 힘들었던 모양이다.
1980년대 산울림이 록 밴드로부터 점차 솔로 싱어송라이터로 변모하면서 산울림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도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6집), 〈청춘〉(7집), 〈내게 사랑은 너무 써〉, 〈회상〉(이상 8집), 〈너의 의미〉(10집),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11집·사진) 등 ‘포크 성향의 발라드’가 주조다. 이 곡들이 그저 부드럽고 서정적인 노래들이 아니라 우울하고 쓰라린 노래들이라는 점을 당시에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
이 무렵 김창완의 음악을 ‘포크’라고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모르지만, 이 시기 김창완은 꾸러기들이라는 통기타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1985년과 86년 한 장씩 음반을 발표한 이 그룹은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라는 곡과 더불어 ‘100일 라이브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이 그룹의 멤버들은 그 뒤 히트곡 한두 가지 정도를 보유한 솔로 가수로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간략히만 설명한다면, 최성수(〈후회〉), 임지훈(〈사랑의 썰물〉), 신정숙(〈그 사랑이 울고 있어요〉), 윤설하(〈지붕 위의 바이올린〉), 권진경(〈권진경〉) 등등이 그들이다.
이 무렵 김창완이 이은하에게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1984) 등을 작곡해 주고, 동물원의 데뷔 음반(1988)에도 이런저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들도 기억해 둘 만한 일이다. 그 외에 음반 프로듀싱이나 드라마 음악 제작 등 이 시기 김창완의 자취에 대해서는 생략한다. 이에 대해 ‘연예산업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해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창의적인 재능을 보유한 사람이 여유롭게 자신의 창작에 몰두할 수 없는 연예산업의 얄궂은 시스템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는 예들이다. 이 무렵 김창완의 노래가 우울하고 쓰라렸다면 이런 이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 ‘김창완 사단’이 대학생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80년대의 언젠가 김창완이 대학교 축제에 초대되어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총학생회’에서 전기 플러그를 뽑는 등 공연을 방해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면, 이 사실에 대한 공적 해석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 해석으로는, 김창완과 산울림의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당시 내 주변의 동료들이나 후배들은 한결같이 소심하고 섬세했고, 캠퍼스의 주변에서 겉돌았던 것 같다. 그 중 한 녀석은 술이 취해서 노래를 부를 때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라는 부분을 ‘샤우트 창법’으로 불러댔다. 어쩌면 당시 김창완도 그렇게 노래 부르고 싶었을지 모른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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