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21 17:50
수정 : 2007.06.21 17:50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103) 동물원
동물원에 대해 회고한다는 것은 노스탤지어를 말하는 것과 똑같다. 달리 말하면 동물원의 노래들은 시간이 흘러서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 그 노래들을 들을 때부터 진하고도 강한 노스탤지어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의 많은 노래들은 꿈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 꿈이란 장래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노스탤지어. 동물원에 속했던, 그리고 거쳐 갔던 싱어송라이터들(김광석, 김창기, 박기영, 유준열, 박경찬, 배영길 등)은 ‘서울 아이들’이다. 이때의 서울이란 아찔한 스카이라인를 가진 강남이나 인공적으로 복개된 청계천, 혹은 앞으로 어디에선가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사족이지만, 진심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빈다. 정치적 이유가 아니다) 대운하와는 전혀 무관한 서울이다. 또한 내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그리고 그 뒤로도 한동안 때가 꼬질꼬질했던 1950~60년대의 서울도 아니다. 그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때려 부숴지고 파 헤쳐지는 와중의 서울이다. 그 전까지 이런 서울을 배경으로 한 노래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혜화동’(동물원 2집(1989) 수록)이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동물원 3집(1990) 수록)처럼 구체적 공간을 가사로 표현한 노래들은 흔치 않다.
두 번째 노스탤지어. 동물원의 음악은 ‘아마추어 포크’이고, 그들은 1970년대의 아이들이다. 이때 1970년대라는 의미는 아직도 아마추어의 노래를 듣는 것이 매우 익숙했던 시절이다. 프로페셔널 가수와 음악인의 쌔끈한 연주와 녹음을 들을 수 있던 기회만큼이나 더벅머리 총각(혹은 긴 생머리의 처녀)이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시절이다. 가정, 학교, 교회 같은 일상의 공간은 물론 그리고 대학교 주변의 카페나 술집, 혹은 모꼬지(MT) 갔을 때의 민박집 같은 특별한 장소들도 아마추어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던 공간들이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울이 이전과는 영 딴판인 세상이 되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던 아마추어들의 노랫가락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 우리는 동물원이라는 더벅머리 총각들의 ‘통기타 그룹’의 음반을 집어들게 되었다. 이런 노래들을 듣고 ‘짠’한 느낌을 받고 지금도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서울의 공간들과 아마추어의 노랫가락에 대한 구체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동물원이 발표한 네 장의 음반들은 그 시대의 일상에 관한 소박하면서도 구체적인 기록이다. 공중전화 박스(‘유리로 만든 배’)나 동시상영관(‘명화극장을 보고’) 같은 것들마저 이제 사라져버린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그 뒤의 동물원은? 김광석은 2집 이후 동물원을 떠나 솔로 아티스트로 프로페셔널의 경력을 걸었고, 7집(1997) 이후 김창기와 박경찬도 생업을 찾아 탈퇴한 뒤 3인조(유준열, 박기영, 배영길)로 축소 재편되었다. 8집(2001)과 9집(2003) 이후 동물원은 매년 가을 용문산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낯설다. 김광석이 자살한 지 벌써 10년이 더 지났다는 것도, 김창기가 정신과의사라는 직함으로 텔레비전 아침 토크쇼에 나오는 것도 낯설다. 그건 서울이 서울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낯선 것과 마찬가지고, 집에 있는 통기타가 줄 한 두 개가 끊어진 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