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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5 18:01 수정 : 2007.07.05 18:01

1991년 솔로 데뷔 뒤 라이브 공연을 하는 이승철.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105) 이승철·김종서·임재범: 발라드 가수로 변신한 메탈의 주역들

1986~87년 시나위, 부활, 백두산, 에이치투오(H2O) 등 이른바 메탈 4인방이 뜨거운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곧 전국적으로 ‘우리도 그들처럼’을 꿈꾸는 새로운 메탈 밴드들이 잇따라 결성됐고, 한국 메탈의 출발을 알린 1세대들도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요컨대 1988~90년은 메탈이 대중화된 시기,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였다. 크라티아(엘에이 메탈), 아발란쉬(스래시 메탈), 디오니서스(바로크 메탈) 등 특정 하위 장르를 추구하는 밴드들도 등장했는데, 여러 갈래로 분화된 양상은 메탈의 기반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메탈의 전성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블랙홀, 부활, 시나위 같은 ‘빛나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90년대의 문턱을 넘으며 소멸해 갔다. 그 과정에서 또는 그 결과로 일어난 일은 다들 알고 있는 대로다. 이승철, 임재범, 김종서 등 간판급 보컬리스트들은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가요계의 복판으로 성큼 나아갔고, 악기 연주자들 상당수는 세션맨과 작·편곡가로 ‘업종전환’ 했다.

서태지를 제외하면, 이승철, 김종서, 임재범만큼 성공한 메탈 출신 음악인은 없을 것이다. 부활 출신의 이승철은 88년 일찌감치 솔로로 데뷔하여 단숨에 정상급 가수로 올라섰다. 그가 감성적 호소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 같은 발라드를 우선 공략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승철은 이어서 〈소녀시대〉 〈오늘도 난〉 등 댄스곡은 물론 록, 아르앤비, 재즈 등 다양한 스타일을 소화하며 풍부한 표현력과 가창력을 자랑했다. 라이브의 황제로 공인받고 있는 점이나 2000년대 제2의 전성기를 보내며 롱런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조용필의 후계자란 영광스런 칭호는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시나위, 카리스마 등을 거친 김종서 역시 발라드로 스타트를 끊었다. 뛰어난 하이톤을 절절히 담은 〈대답 없는 너〉 〈겨울비〉 등을 히트시키며 솔로로 안착한 그는 록 발라드의 기수로 승승장구했다. 〈세상 밖으로〉 등 흥겨운 업템포 록 넘버들도 인기를 끌었지만, 아무래도 〈아름다운 구속〉같이 서정적 선율과 부담스럽지 않은 록 사운드를 결합한 곡들이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시나위, 외인부대, 아시아나를 거친 임재범도 발라드를 핵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앞의 가수들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데뷔곡 〈이 밤이 지나면〉에서 보듯, 강력한 쇳소리와 파워를 자랑하던 목소리에서 마이클 볼턴을 연상시키는 솔풍의 음색으로 과감히 변신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임재범은 〈사랑보다 깊은 상처〉에서 깊은 울림을 남기며 매우 넓은 호응을 얻었지만, 은둔자적인 활동으로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대마초 파동이란 암초에 걸려 ‘외파’된 70년대 그룹사운드와 달리, 80년대 헤비메탈은 ‘내파’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자부심과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외골수 메탈 공동체 성원들에게 적지 않은 흉터를 남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기름진 자양분과 옹골찬 열매가 되어 주었다. 누구도 원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지만.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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