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23 21:26
수정 : 2007.08.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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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발매된 윤도현 솔로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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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 - 민중가요와 록의 만남
1990년대 들어 민중가요는 대중화·세련화의 길을 걸었지만, 동시에 음악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비판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선택된 것은 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를 ‘포스트 민중가요’ ‘민중 록’이라 할 수 있다면, 그 선두에는 1993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많은 인기를 얻은 〈청계천 8가〉를 할 천지인이 있다. 그 뒤 이스크라(1996), 메이데이(1997)로 이어지며 록을 도입한 민중가요는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자연주의, 순수주의에 입각해 어쿠스틱 사운드, 투명한 소통을 중시했던 그간의 민중가요 공동체가 왜 록을 수용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록=저항의 미학’으로 설정했던 비평적 흐름이 후광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대중문화 담론과 더불어 성행한 록 담론의 직·간접적 효과라고 할까. 음반 사전심의제 철폐, ‘자유’ 콘서트 등도 이런 흐름과 결탁했다.(록그룹 이스크라와 메이데이를 기획한 ‘뮤직센터21’은 몇 년 뒤 인디레이블 ‘인디’로 이어지면서 ‘록=저항=태도’라는 공식을 계속 설파했다.)
하지만 이 담론의 최대 수혜자는 윤도현밴드(현 YB)가 아닐까. 지금이야 록 밴드로 각인되어 있지만 출발은 포크였다. 김현성 등과 함께한 포크 노래동인 ‘종이연’ 출신답게 1995년 솔로 음반은 포크의 연장에 있었지만, 이듬해 밴드 형태의 음악에 박노해 시를 붙인 〈이 땅에 살기 위하여〉 등을 실은 2집과, 〈한국 록 다시 부르기〉 음반(1999)에서 저항적 록 밴드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YB 멤버 박태희(베이스)와 김진원(드럼)은 메이데이 출신이다.
민중가요와 무관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성향의 음악을 담은 가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강산에를 손꼽을 수 있는데, 1집 〈라구요〉(1992), 2집 〈넌 할 수 있어〉(1994), 3집 〈삐딱이〉(1996) 등으로 비평적 상찬과 대중적 인기를 두루 획득했다. 특히 사회에 대한 ‘삐딱’한 태도와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았다는 점에서 민중가요와 무관하면서도 일맥상통한 음악을 만들었고, 한국 전통음악과 전혀 관련되지 않으면서도 한국적 정서가 담긴 록 음악을 불렀다.
1990년대 중후반의 윤도현이나 강산에 음악은 풋풋하면서도 진솔한 포크 록적 기반에 비판적 메시지를 담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시원한 열창형 노래에 목소리톤까지도…. 그런 점에서 이들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활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음기획’ 소속 뮤지션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이들 외에 정태춘과 박은옥, 뜨거운 감자(김C), 권진원 등이 소속된 곳이다.
그렇다면 민중가요, 또는 민중가요적 태도와 록을 혼융한 뮤지션들의 전말은? 민중 록 밴드로 자처한 포스트 민중가요 계열 밴드들은 한 곡 반짝 인기를 누리고는 잊혀지는 이른바 ‘원히트원더’, 또는 음반 한 장을 낸 뒤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한편 윤도현(밴드)은 더없이 좋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의 상반되는 이미지들은 혼란스럽다. 이름에 견줘 창작력도 미비하여 음악적 성취도에서도 이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반미·반전의 기수, 비판적 로커를 자처하다가도, 상업성과 결탁된 월드컵 응원가 사건에 휘말리듯이, 음악 역시 흔한 사랑가와 분방한 록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간다. 연예인과 선동자, 주류적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을 제대로 봉합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주류 음악이 되지 못한 한국 록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최지선/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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