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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20 20:08 수정 : 2011.04.20 20:08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자책은 리더의 숙명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로버트 서튼 교수는 최근 저서에서 진정한 리더는 위기상황에서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적고 있다. 책임에 소극적인 리더에게 진정한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지난달 나는 가톨릭 수도사한테서 베네딕트수도회의 오랜 전통에 대해 들었다. ‘쿨파’(죄라는 뜻)라는 제도인데, 모두가 모여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자리이다. 그분은 쿨파에 참여할 때마다 많은 부담이 있지만 마치고 나면 너무도 큰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나온다며 “고백의 순간이 바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순간”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2004년 피오나 리를 비롯한 미시간대와 스탠퍼드대 연구팀은 최고경영자(CEO)의 태도와 기업 주가 사이의 연관성을 조사하여 ‘메아 쿨파’(Mea Culpa)라는 제목의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메아 쿨파는 ‘내 탓이오’라는 뜻이다. 기업들이 해마다 발표하는 연차보고서에는 시이오가 한 해를 돌아보며 쓰는 편지가 실린다. 연구자들은 이 편지를 분석하면서 주가 하락이나 프로젝트 실패 등 각종 부정적 사안에 대해 시이오들이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 부류는 최고 책임자로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철저한 준비 부족 등 ‘자기 탓’으로 돌리고, 또 한 부류는 경제 불황이나 정부 정책을 들먹이며 ‘남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14개 기업의 시이오들을 두 부류로 나누고, 이듬해의 주가가 어땠는지를 21년치 자료를 모아 분석했다. 놀랍게도 ‘내 탓’을 한 기업이 ‘남 탓’을 하는 기업의 주가보다 일관되게 높았다. 또한 연구자들은 자책하는 시이오와 그 기업에 대해 사람들이 리더십은 물론 투자 의향 등에서도 훨씬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최근 카이스트가 위기를 겪고 있다. 나는 카이스트에서 4년째, 위기에서 리더가 내놓는 반응, 특히 사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학교의 반응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4일 세번째 자살 이후 나온 총장 명의의 편지는 카이스트 대학본부의 시각을 읽을 수 있는 자료였으나 연구자로서 적잖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학생이 아닌 학교 중심의 논리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말 첫번째 학생의 자살 이후 서남표 총장은 한 인터뷰에서 ‘장짤’(학점이 낮으면 장학금이 잘리는 제도)과 관련해 “‘책임지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내면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며 “똑똑하고 머리 좋을수록 책임감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 더 폐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초유의 사태를 맞아 카이스트 교수들은 얼마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을까? 안타깝게도 총장 명의의 편지에는 ‘책임’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질 않는다.

10년 넘게 기업 위기관리 컨설팅을 해온 사람으로서 보면 이처럼 구성원이 다섯명이나 자살하는 사건은 가장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하지만 카이스트가 내놓은 편지에서는 세상을 등진 학생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과하는 부분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3401자로 구성된 편지 중 “심심한 사과”와 “심심한 애도” 등의 의례적 사과가 3%를 차지할 뿐이다. 반면 명문대학은 경쟁하고 부모들은 명문대학을 원한다는 이른바 ‘명문대론’에는 편지의 3분의 1(33%)이나 할애했다.

큰 충격으로 혼돈에 빠진 사회 여론을 향해 카이스트는 보직교수가 ‘급히’ 개선안을 발표하고, 총장은 “들은 바 없다” 하고, 새벽에 홍보실은 “잘못됐다”고 발표하는 어이없는 촌극도 벌였다.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는 카이스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로봇과 컴퓨터, 기계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이 학교가 학생의 심리와 사회의 여론을 대하는 방식에서는 가장 ‘비과학적’인 것은 아닐까? 과학은 분명하게 말한다. ‘내 탓이오’가 우리 모두를 살린다고.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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