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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10 19:25 수정 : 2012.12.10 19:25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월팝, 브이존, 스튜디오 80… 지금은 모두 없어진 이름이지만, 1980년대 강남역 뉴욕제과 근처에서 ‘놀던’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디스코텍이었다. 6·10 항쟁이 있던 87년에 대학을 들어간 나는 전형적인 ‘의식 없는’ 대학생이었다. 2학년 되던 해 이 일대에 발을 들여놓았고, 한동안 그쪽 세상에 빠졌었다. 런던 보이스의 ‘할렘 디자이어’로 시작해서 조지 마이클의 ‘키싱 어 풀’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영화 <남영동 1985>를 봤다. 하지만 상당부분을 볼 수가 없었다. 민주화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죄로 남모르는 곳에서 고 김근태 의원이 ‘당했던’ 끔찍한 고문을 나는 차마 ‘볼’ 수조차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머릿속에서 남영동과 월팝이 오버랩되었다. 80년대 디스코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김근태 의원을 비롯해 고문당했던 민주화 인사들의 비명을 외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을 만났다. 소탈한 인 의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미안함에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고 김근태 의원님과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 때가 언제셨나요?”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 의원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김근태 의원이 정치로부터 물러난 뒤, 아침에 도봉구 초안산을 함께 산책하던 시간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에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어린 소녀를 위안부로 동원하고 독립투사를 고문했다. 시간이 지나 그런 사실을 용서할 수 있을 진 몰라도 절대 잊을 수는 없다. 역사로 남겨 앞으로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의 또다른 시대에 어떤 희생과 억압이 있었는지, 이에 관해 제대로 된 참회와 사과가 있었는지 물어야 하고, 이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똑같이 해야 한다. 김근태 의원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개인적으로 ‘용서’했을 수는 있지만, 김근태 의원으로 상징되는 많은 민주화 인사들에게 국가권력이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포기브 낫 포겟’(forgive, not forget)이란 말은 여기에 적용되어야 한다. 위대한 경영역사학자 앨프리드 챈들러는 “과거에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미래에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김근태 의원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빚진 마음’이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들, 국가권력으로부터 억울한 고문을 당하고 폭력을 경험했던 무고한 시민들, 이런 사람들의 비명을 듣지 못하고 고통을 위로하지 못했던 일이 마음속에 빚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011년 12월30일 세상을 뜬 김근태 의원은 그의 블로그 마지막 포스팅 “2012년을 점령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라고. 어린 시절 현실을 외면했던 못난 선배지만 2030세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투표장에 나가서 나의 뜻이 무엇인지, 2030세대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 달라는 것이다. 누구를 찍는가는 둘째 문제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결국 나의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동일어라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12월19일, 투표장 기표소 안에서 나는 잠시나마 김근태 의원을 생각하려고 한다. 잘못된 권력을 향해 제대로 소리 한번 못 질러본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러나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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