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인간’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포함할까? 이런 작은 물음으로 그 문안의 의미는 갑자기 모호해진다. 거기에 여성이 포함되었을까? 실상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역사가 린 헌트는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은 ‘남성’권 선언이었고, 3대 모토의 하나였던 박애는 ‘형제애’였음을 설득력 있게 논파했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정도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을 포함한 당대 남성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혁신적인 주장을 펼친 여성이 있었다. 흑인 노예제에 반대하는 희곡이나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는 글을 통해 약간의 명성을 얻었던 올랭프 드 구주는 희망과 기쁨으로 프랑스 혁명을 반겼다. 그러나 평등의 권리가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인권선언문’에 빗대 ‘여성권선언문’을 썼고,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루소에 빗대 성적 평등에 바탕 둔 결혼을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썼다.
“여성은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여성은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평등하게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형장에 올라 기요틴으로 처형당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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