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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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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은 왕이 개인적인 악행을 저질렀더라도 왕의 직책은 신성한 것이니 그를 처벌할 수 없다는 근거로 흔히 사용되었다. 또한 세습을 통해 왕위가 이어지더라도 왕의 직책 자체가 신성한 것이니 왕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따라서 절대주의 왕국이 존립할 근거가 되기도 했다. 반면, 이론이란 양날을 가져 자신을 향한 비수로 되돌아올 수도 있는 법이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 와중에 찰스 1세를 처형했을 때, 혁명파에서는 신성한 왕의 직위를 보존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사악한 국왕을 제거한다는 논지를 내세웠던 것이다.
칸토로비치는 나치 집권 당시 인종 차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버클리에서는 매카시즘이 휩쓸 때 충성 서약의 서명을 거부해 프린스턴대학으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그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란이 지속된다. 노먼 캔터라는 캐나다의 저명한 중세사가가 그의 지적 기질과 문화적 가치관이 나치와 같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적 우익 민병대와 신비주의적이고 국수주의의 기질이 있는 시인 슈테판 게오르게의 추종 집단에 가입하여 행동했던 전력 때문일 것이다.
개과천선을 했어도 전력이 문제되는데, 변절을 한 정치가들이 득세하는 이곳의 풍토는 어디에서 왔을까?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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