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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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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혜안 중엔 ‘이성의 야만’이란 게 있다. 야만이란 미개하여 이성이나 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조화와 절제에 대한 관념이 없어 거친 폭력이나 감정의 폭발에 의존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이성이나 문명이란 개념은 야만과는 대척점에 있는데, 그런 단어들의 조합이 어떻게 가능할까?
비코는 ‘이성의 야만’의 대립으로 ‘감각의 야만’을 든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과 야수적인 감정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야만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기에 ‘감각의 야만’이다. 이 원초적 야만은 덜 위험하다. 쉽게 눈에 띄어 방어하거나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성의 야만’이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말로 포옹을 하면서 뒤에서는 친구와 친지의 등에 비수를 꽂는 야만이다. 말과 사물이 일치하지 않는 반어법, 즉 아이러니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이 야만은 보이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운하 사업’이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껍데기로 바뀌어 진행된다. ‘법치’라는 명목 아래 법은 있는 자들의 큰 권한을 비호하고, 없는 자들의 작은 권리마저 박탈한다. 일본 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목격하였음에도 눈앞의 ‘실익’을 위해 원전을 옹호한다. 모두가 ‘이성의 야만’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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