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저는 이 시대의 ‘노블레스’는 ‘뉴 리치’가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국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미디어와 오픈소스로 급변하는 시대를 읽어내는 이들이 정치적 냉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새 정치의 장을 열어 갈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다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요. <특혜와 책임>을 읽었습니다. ‘꼴보수’와 ‘꼴페미’가 어떻게 친할 수 있냐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2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옆 연구실을 썼던 후배 교수로서 선생님께서는 ‘괜찮은 보수’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우려낸 차를 마시는 여유, 산을 타며 키운 호연지기, 맨얼굴의 여교수를 편견 없이 보는 시선, 축의금을 받지 않기로 한 자제 혼인식에 이르기까지 정도를 지키며 사는 선생님 모습이 좋았습니다. 이번 책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사는 우리 지도층이 무슨 ‘금수저’인가요. 그들은 ‘독수저’를 갖고 있는 거예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없는 고위층은 본인에게도 그리고 국가에도 재앙일 뿐입니다.” 지난주부터 그런 사회를 치유하는 방안을 제시할 글을 신문에 연재하시기로 하셨다고요. 이참에 선생님과 생각의 거리를 좀 좁혀볼까 싶습니다. 이분법에 갇힌 사회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엄청난 나라’가 된 것은 두 개의 힘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지도력과 기업 및 군대의 조직력, 다른 하나는 4·19 이후 민주화와 노동운동인데 전자가 ‘본’이고 후자가 ‘말’이라고 하셨지요. ‘본’이 없이는 ‘말’이 없는 것인데 1990년대에 민주화 세력이 그 본을 무시하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고전분투하다 보수로 불리게 되셨다고요. 중용을 중시하는 선생님이 이 싸움을 하게 된 것이었군요. 그런데 선생님, 본과 말을 따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후기 근대는 ‘정당성의 위기’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하버마스가 말했었지요? 실은 ‘동기상의 위기’가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모두 뒤엉켜 ‘네 탓’을 하는” 천민성을 드러내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은 한국이 그간 국가의 기틀을 제대로 잡아 이제 복지국가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하셨는데 저는 지금의 한국은 불신과 적대로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격한 중산층의 몰락과 함께 전자 금융 결제 시스템조차 제대로 업그레이드해내지 못하는 부실한 ‘3류 국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근대 그 이후’를 상상하며 ‘정치’를 회복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에서부터 시작해서 글로벌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본’과 ‘말’을 따지는 진영논리를 넘어서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봅니다. 최근 <듣도 보도 못한 정치>라는 책을 펴낸 이진순 박사는 현 정치의 난맥상을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형성된 ‘반공 민주주의’와 4·19에서 6월 항쟁을 하면서 형성된 ‘반독재 민주주의’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두 거대 정치 진영은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 사실상 적대적 공생의 양당 체제를 고착시켰다고 말합니다. 소련식 사회민주주의는 칠십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몰락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도 급격히 몰락 중인 시점에 냉전체제의 적대적 언어로 정권을 잡으려는 행태는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요. 지금은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근본적 성찰에 들어간 북유럽식 민주주의를 들여다볼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챙기면서 신뢰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회민주주의 말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대의 ‘노블레스’는 ‘뉴 리치’가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적정한 돈과 정신적 자산을 겸비한 국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보다 튼실한 정치적 감각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어야 하지요. 글로벌 미디어와 오픈소스로 급변하는 시대를 읽어내는 이들이 정치적 냉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새 정치의 장을 열어 갈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다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요. 제가 요즘 노동시간 단축이나 시민배당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종북좌파’와 ‘반민주’를 이야기하면서 적대감을 부추겨 표심을 얻어내려는 총선 후보들을 낙후시키고 탁월한 통찰력과 윤리적 감각을 가진 이들을 발굴하는 일도 시급하고요. 조만간 제자들과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을 염려하는 노년의 국민으로서 이런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추워지기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칼럼 |
[조한혜정 칼럼] 송복 선생님께 |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저는 이 시대의 ‘노블레스’는 ‘뉴 리치’가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국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미디어와 오픈소스로 급변하는 시대를 읽어내는 이들이 정치적 냉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새 정치의 장을 열어 갈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다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요. <특혜와 책임>을 읽었습니다. ‘꼴보수’와 ‘꼴페미’가 어떻게 친할 수 있냐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2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옆 연구실을 썼던 후배 교수로서 선생님께서는 ‘괜찮은 보수’의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우려낸 차를 마시는 여유, 산을 타며 키운 호연지기, 맨얼굴의 여교수를 편견 없이 보는 시선, 축의금을 받지 않기로 한 자제 혼인식에 이르기까지 정도를 지키며 사는 선생님 모습이 좋았습니다. 이번 책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사는 우리 지도층이 무슨 ‘금수저’인가요. 그들은 ‘독수저’를 갖고 있는 거예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없는 고위층은 본인에게도 그리고 국가에도 재앙일 뿐입니다.” 지난주부터 그런 사회를 치유하는 방안을 제시할 글을 신문에 연재하시기로 하셨다고요. 이참에 선생님과 생각의 거리를 좀 좁혀볼까 싶습니다. 이분법에 갇힌 사회가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엄청난 나라’가 된 것은 두 개의 힘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지도력과 기업 및 군대의 조직력, 다른 하나는 4·19 이후 민주화와 노동운동인데 전자가 ‘본’이고 후자가 ‘말’이라고 하셨지요. ‘본’이 없이는 ‘말’이 없는 것인데 1990년대에 민주화 세력이 그 본을 무시하기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고전분투하다 보수로 불리게 되셨다고요. 중용을 중시하는 선생님이 이 싸움을 하게 된 것이었군요. 그런데 선생님, 본과 말을 따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후기 근대는 ‘정당성의 위기’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하버마스가 말했었지요? 실은 ‘동기상의 위기’가 사회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모두 뒤엉켜 ‘네 탓’을 하는” 천민성을 드러내고 있는 중입니다. 선생님은 한국이 그간 국가의 기틀을 제대로 잡아 이제 복지국가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하셨는데 저는 지금의 한국은 불신과 적대로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급격한 중산층의 몰락과 함께 전자 금융 결제 시스템조차 제대로 업그레이드해내지 못하는 부실한 ‘3류 국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근대 그 이후’를 상상하며 ‘정치’를 회복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에서부터 시작해서 글로벌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본’과 ‘말’을 따지는 진영논리를 넘어서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봅니다. 최근 <듣도 보도 못한 정치>라는 책을 펴낸 이진순 박사는 현 정치의 난맥상을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형성된 ‘반공 민주주의’와 4·19에서 6월 항쟁을 하면서 형성된 ‘반독재 민주주의’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두 거대 정치 진영은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 사실상 적대적 공생의 양당 체제를 고착시켰다고 말합니다. 소련식 사회민주주의는 칠십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몰락했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도 급격히 몰락 중인 시점에 냉전체제의 적대적 언어로 정권을 잡으려는 행태는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요. 지금은 1·2차 대전을 거치면서 근본적 성찰에 들어간 북유럽식 민주주의를 들여다볼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서로를 챙기면서 신뢰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회민주주의 말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민주주의를 재발명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시대의 ‘노블레스’는 ‘뉴 리치’가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적정한 돈과 정신적 자산을 겸비한 국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보다 튼실한 정치적 감각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어야 하지요. 글로벌 미디어와 오픈소스로 급변하는 시대를 읽어내는 이들이 정치적 냉소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한 새 정치의 장을 열어 갈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다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요. 제가 요즘 노동시간 단축이나 시민배당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종북좌파’와 ‘반민주’를 이야기하면서 적대감을 부추겨 표심을 얻어내려는 총선 후보들을 낙후시키고 탁월한 통찰력과 윤리적 감각을 가진 이들을 발굴하는 일도 시급하고요. 조만간 제자들과 손주들이 살아갈 세상을 염려하는 노년의 국민으로서 이런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추워지기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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