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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29 18:32 수정 : 2017.08.29 19:06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10년 이공계가 상당한 퇴보를 했다고들 말하는데 실제로 탁월한 연구자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 중 하나가 대박을 터트리겠다는, 이른바 정치에 밝고 ‘수완 좋은’ 교수들이 연구비를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면 사기꾼만 양산하게 된다.

정부의 ‘4차 산업혁명 정책’에 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계원예술대 서동진 교수는 <창비> 가을호에 실린 글에서 4차 산업혁명 담론이 기술혁신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는 기술 유토피아적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가져갈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대로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기술이 삶 전체에 메가톤급 파문을 몰고 올 것이라는 수사만 무성할 때 국민들에게 이 개념은 협박으로 다가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간 정부 자문에 응해온 동료 교수들도 정부 부처마다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뭔가를 해내려고 허둥대는 것을 보면서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소화되지 않은 개념으로 행사와 정책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주제를 두고 시대 공부를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2016년 정치가와 준전문가들의 모임인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부각시킨 용어로 애매모호한 선동적 개념이다. 급변기를 강조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활용할 수는 있다. 나 역시 미래 세대에 대한 강연을 할 때 우리 아이들을 기계처럼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잘 놀고 생각하고 의논할 줄 아는 ‘시민’으로 키워야 한다며 ‘알파고’와 4차 산업을 들먹이곤 한다. 그러나 빅데이터가 3.0 산업혁명에 포함되는 것인지, ‘인더스트리 4.0’이라고 부르는 독일의 제조업 혁신이 4차 산업혁명의 시작인지 등등의 규정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을 국가의 정책 기조로 삼는다는 것은, 지난 정부가 ‘창조경제’로 슬로건 정치를 하려고 했던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간 한국은 “산업사회에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장서자”면서 정보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정보기술/3차 산업혁명’에서는 그런대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때도 기술혁신과 문화적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냈다기보다 기술이 선도함으로써 ‘요상한 연결망 세상’(weird wired worl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10년 이공계가 상당한 퇴보를 했다고들 말하는데 실제로 탁월한 연구자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 중 하나가 대박을 터트리겠다는, 이른바 정치에 밝고 ‘수완 좋은’ 교수들이 연구비를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면 사기꾼만 양산하게 된다. 4차 산업 분야를 둘러싸고 이미 영역싸움이 치열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양상 말이다.

학계만이 아니라 업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2015 세계 인재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10점 만점에 3.98점으로, 조사 대상 61개국 가운데 44위였다. 두뇌 유출로 인한 피해가 61개 나라 가운데 18번째로 심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3차 산업혁명을 ‘절반’ 정도 이루었지만 사실상 입시교육이나 조직의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행태를 보면 2차 산업혁명기의 마인드에 다분히 머물러 있다. 3차 산업 종사 청년들이 부쩍 ‘선진국’으로 이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직문화를 제대로 바꾸어내고 기초 체력이 든든한 사회를 키워내야 했던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이름 아래 우리가 정말 해내야 하는 일은 작게는 암기 위주의 교육과 승자독식의 사회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계 연구자들과 ‘공돌이’들이 직업인 이전에 상식적 시민으로서 연구/삶의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사회와 접점을 찾아 활발한 공론화의 장을 열어갈 때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부서별 경계를 넘나들며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공무원이 많아질 때 가능해질 일이다. 초연결/초융합 활동은 공유와 신뢰가 근간인 수평적 사회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다. 만일 정부와 시민사회가 좀 더 욕심을 낸다면 ‘4차 산업혁명과 윤리 위원회’를 만들어볼 수 있다. 과학이 윤리와 만나고 기술이 사람과 만나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개념 작업을 해낸다면 그것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할 획기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허망한 꿈을 꾸지 않고 착실하게 가는 것, 아는 척하지 않고 ‘아는 것’만 말하는 것, 단계를 제대로 거치는 것이 과학기술의 기초이다. 지금은 슬로건을 외칠 때가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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