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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9 18:57 수정 : 2012.06.29 18:58

이정국 기자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주폭’.

이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 먼저 제 소개를 해야겠군요. 현재 <한겨레> 사회부 24시팀 소속으로 경찰청을 출입하는 30대 중반(!)의 이정국입니다. ‘친절한 기자들’ 코너에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소개가 끝났으니 다시 주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주폭’이란 단어는 특허청에 상표등록(등록번호 40090705400000)이 돼 있습니다. 뭐, 말 그대로 ‘특허’인 셈이죠. 특허 출원인은 다름아닌 김용판 서울지방 경찰청장입니다. 김 서울청장은 지난해 4월 충북지방경찰청장에 재직하면서 특허를 신청했죠.

만약 어떤 영화 제작자가 ‘주폭 마누라’라는 영화를 제작한다면 허락을 받고 사용료를 김 청장에게 지불해야 합니다. 출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니까, 주폭이다’라는 책을 만들려면 당연히 사용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병원도 마찬가지지요. ‘주폭 치료 전문 병원’이라는 간판은 못 내겁니다. 혹, 사용료를 내더라도 꼭 사용하겠다는 분이 있다면 꿈을 접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 서울청장은 상표 등록의 이유를 “상업적 이용을 막기 위함”이라고 밝혔거든요.(지금 쓰는 이 글은 공익적 용도입니다!)

먼저 용어의 뜻부터 살펴볼까요. 주폭은 ‘주취 폭력’의 줄임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술에 취한 상태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주폭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말이 새롭지 그 행위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지요.

요즘 경찰이 이 ‘주폭’에 애착이 많습니다. 아, 큰일날 뻔했군요. ‘주폭 검거’에 애착이 많습니다. 경찰청은 최근 경찰 쇄신안을 발표하면서 5대 폭력 범죄 안에 ‘주폭’을 넣었습니다.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성폭력·학교폭력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은 셈이지요. 경찰서마다 ‘주폭 피의자 검거’라는 보도자료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옵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한달 만에 100명의 주폭사범을 구속하는 ‘탁월한’ 실적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현재 전국 249개 경찰서 가운데 182개의 주폭수사 전담팀이 설치돼 있고, 총 843명의 경찰이 주폭 검거를 위해 배치됐습니다. 경찰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만한 대목입니다.

모든 경찰이 ‘주폭 척결’에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최근 친한 경찰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그 경찰은 “일 늘어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느냐”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김용판 서울청장에 대한 불만도 쏟아냈습니다. “자기가 만든 말이라고 해서 경찰 전체에 드라이브를 걸면 일선에선 답답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또 “대놓고 경쟁을 시키지는 않지만, 서울 각 경찰서마다 알게 모르게 실적 경쟁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주폭은 사실 김용판 서울청장이 처음 드라이브를 걸고, 경찰 전체가 따라온 경우입니다. 위 특허사례에서도 보듯 경찰의 애착이라기보다는 김용판 청장의 개인적 애착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경찰청의 한 고위 간부도 ‘주폭’이란 말을 꺼냈더니 “그건 서울청 얘기”라고 못을 박더군요.

김용판 서울청장의 ‘주폭 드라이브’에 한몫 거드는 것은 한 보수신문입니다. 이 신문은 지난 5월 경찰의 ‘주폭과의 전쟁’ 보도자료가 나온 다음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기다렸다는 듯이) 주폭 기획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 기획기사는 현재 수십회 진행중입니다.

술에 만취한 상태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기존 법이나 경찰력으로도 해결이 가능한 사안을 왜 지금 시점에서 쟁점화시키는 걸까요. 또다른 ‘사회의 적’을 만들려는 의도는 아닐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한센병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반인들과 철저하게 격리됩니다. 중세 말엽 한센병이 사라지면서 이들을 격리 수용한 건물들은 무용지물이 되죠.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했던 건물은 어떻게 됐을까요? 헐어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정신병자와 범죄자들을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개조해 그대로 유지합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없는 속칭 ‘바보’들도 잡아 가두기 시작합니다.

지금 경찰이 벌이는 주폭과의 전쟁은 중세 유럽에서 펼쳐졌던 ‘바보 잡아 가두기’를 연상케 합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은 경찰력을 줄일 수 없는 경찰이 선택한 ‘생존의 법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정국 사회부 24시팀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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