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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14 18:37 수정 : 2012.09.25 16:53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14일 서울 필동의 환경미화원 휴게실을 방문해 간담회를 마치고 휴식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토요판]다음주의 질문
인혁당 사건 ‘유가족 위로’만 고집
무엇이 잘못인지 어리둥절한 모습

‘인혁당 발언 파문’이 잘나가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발목을 잡고 있다. ‘리얼미터’의 최근(11~12일) 조사 결과 박 후보 지지율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경선후보와의 양자 가상대결에서 전일에 비해 각각 3.3%, 3.0%포인트가 떨어졌다. 12~13일 같은 조사에서는 각각 1.9%포인트 또 떨어졌다. 박 후보의 이른바 ‘광폭 행보’로 얻은 점수가 다 날아가고 있다.

‘법원 판결이 두개가 있으니 역사 판단에 맡기자’는 그의 인혁당 발언에 대해서는 여권과 보수진영에서도 비판이 거세다. 이주영 대선기획단장은 지난 12일 “아버지와 딸로서가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안고 가라고 얘기했다”며 박 후보의 태도 변화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조선일보>도 14일치 사설에서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는 집권당 후보의 유신에 대한 공식 입장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사의 굴레를 뛰어넘어야 한다”며 추석 연휴 전에 “전향적인 입장”을 내놓을 것을 촉구했다.

박 후보가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을 비롯한 유신독재의 잘못에 대한 사과 요구를 추석 전에 받아들일까?

지금까지의 박 후보 태도로 보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인혁당 유가족과 국민들이 바라는 수준의 ‘사과’는 포함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인혁당과 유신에 대한 그의 태도는 5년 전과 변함없다. ‘아픔 이해와 위로’까지가 전부다. “피해를 입으신 분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이상일 후보 대변인의 12일 성명에 담긴 대로다. 5년 전 한나라당 경선 때도 박 후보는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헌신하고 고통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한다”(2007년 7월19일 후보 검증청문회)고 말했다. 고 장준하 선생의 부인을 당시 찾아간 것이나 이번에 인혁당 “유가족이 동의하면 만나겠다”는 것도 ‘이해와 위로’ 차원이다.

박 후보 본인은 이러한 위로를 사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14일치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은 이런 인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수차례 위로의 말씀도 드렸고, 민주화를 위해 더 노력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걸 사과가 아니라고 한다면 진정한 화해의 길로 갈 수가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인혁당 사건이나 유신에 대해 직접적이고 진실되게 사과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사과’라는 표현에는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인혁당 두개의 판결’ 발언과 관련해 홍일표 당 대변인이 12일 “표현상의 오해에 대해 사과한다”는 ‘대리 사과’ 성명을 낸 데 대해 그가 즉각 부인한 것은 단적인 예다.

이처럼 사과를 꺼리는 것은 인혁당과 유신에 대한 박 후보의 기본 생각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유신에 대한 그의 논리 구조는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1981년 10월28일 일기)는 데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인혁당 사건에 대한 인식은 더 고약하다. 그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질문에 “민주인사라는 분들에는 진정 민주화에 헌신한 분들과 민주화라는 탈을 쓴 친북좌파가 있다”(2007년 2월14일 미국 워싱턴 동포 언론 간담회), “민주화 운동을 하는 데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순수하게 우리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해 사과드린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탈을 쓰고 나라의 전복을 기도한 세력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다”(2007년 6월19일 대선후보 정책토론회)라고 말했다. 인혁당 희생자들은 ‘순수한’ 민주화 세력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가 인혁당 피해 유가족에게 사과가 아닌 위로만 고집하는 것은 이런 색깔론 탓이다.

1964년 인혁당 1차 사건은 당시 이용훈 대검 공안부장 등 검사 4명이 사표를 내면서까지 기소를 거부했을 정도로 엉터리였으며, 1974~75년의 2차 재건위 사건은 특히 고문과 공판조서 조작 등 국가공권력의 범죄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사실이 그동안 명백하게 밝혀졌다. 이 때문에 ‘권력의 시녀’ 판결을 했던 사법부는 재심(2007년 1월)과 대법원장의 과거사 반성(2008년 8월)을 통해 사법살인을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당시 퍼스트레이디로서 유신독재의 일역을 담당했던 박 후보는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아직도 모르고 있다. 김종철 정치부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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