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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26 20:22 수정 : 2013.07.26 21:38

[토요판] 리뷰&프리뷰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뽀로로가 되는 게 장래희망인 아들내미, ‘언로열 베이비’(unroyal baby)의 엄마 정세라입니다. 국제부 기자로 일하다 보니 종일 외신을 접하고, 사무실에선 <시엔엔>(CNN) 방송이 늘 돌아가는데 이번주는 그야말로 ‘로열 베이비’ 뉴스의 홍수더군요.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케이트 미들턴이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아기를 안은 채 미소짓는 장면을 ‘뻥’ 좀 보태면 한 삼만번쯤 본 것 같습니다. “케이트는 출산한 지 하루 만인데 어째 부기도 없는 거야?” “손가락에 낀 반지가 다이애나 비한테 물려받았다는 그 반지던가?” 뭐 이런 잡다한 수다를 늘어놓으면서요.

‘노란색’ 언론 종사자도 아닌데 태도가 좀 헐렁한가요? 사실 세계 유수한 언론에서 로열 베이비 보도가 쏟아졌지만 대부분은 시시콜콜 수다의 범주에 가깝습니다. 이런 미주알고주알이 이른바 무겁고 골치 아픈 이슈들을 며칠간 싹 지워버리는 효과를 내고 있지요.

열광적인 왕실 팬덤을 지켜보다 보면 이 모든 호들갑의 뒤편이 궁금해집니다. 영국 왕실은 (셀레브리티로) 군림할 뿐 통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동네는 정말로 군주제가 시대착오적이라고 느끼는 공화주의자의 씨가 마른 걸까요? 로열 베이비 뉴스 도배를 공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저 속 좁은 인격의 소유자인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국 안팎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지지, 다시 말해 군주제에 대한 반대는 결코 무시하기 힘든 수치입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로열 베이비, 탄생을 축하하네. 그런데 타이밍은 최악이야’라는 기사로 ‘케임브리지 조지 왕자 전하’의 옥좌 예약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영국에선 여전히 군주제 지지가 압도적이긴 하지만, 공화주의자의 비율도 5명 가운데 1명으로 적지 않습니다. 영국 연방으로 시야를 넓혀,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호주)·뉴질랜드 같은 주요 연방국들의 군주제 지지는 더 취약합니다. 캐나다는 40%가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28%만이 군주제를 선호합니다. 뉴질랜드는 62%가 군주제를 지지하고, 28%가 이를 반대하지만 젊은층의 공화제 선호가 커지고 있어서 앞으로 추세가 바뀔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또 호주는 1999년 군주제 폐지를 두고 국민투표까지 시행했다가 55 대 45로 군주제가 승리했지만 2000년대 중반 여론이 역전되는 등 국민의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입니다.

로열 베이비가 시대착오적이란 공화주의자들의 생각은 명확합니다. 윌리엄과 케이트 부부의 아기는 축복받아 마땅하지만 이들의 아기가 단지 혈통만으로 미래 국가수반 자리에 올라간다는 게 부조리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이 평등한 존재라는 명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비록 선거 때 1인1표를 갖는다는 걸 빼곤 평등권을 실감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태어난 지 만 하루 된 아기를 공공연히 ‘케임브리지 조지 왕자 전하’ 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겠지요.

외국 언론들도 팬덤 뒤편의 가시 돋친 논쟁이 부담스럽긴 했던 모양입니다. 영국의 <가디언>은 로열 베이비 열풍 속에서 왕실 기사를 보지 않을 권리를 독자에게 제공했습니다. 원래는 온라인 누리집을 영국판·호주판·미국판으로 구분해 편집하는데, 이날 하루는 왕정주의자와 공화주의자 편집 선택 버튼을 제공했습니다. 또 영국 <인디펜던트>는 팬덤 열기에 거리를 두는 기사를 주요하게 편집했습니다. ‘로열 베이비: 그는 어제 영국에서 태어난 2000명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그들 세 명 가운데 한 명을 덮칠 빈곤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을 것이다’라는 긴 제목의 기사였지요. 사실 영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수당 정부가 틈만 나면 재정 긴축, 복지 축소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왕실이 예산에서 받는 운영비는 지난해 3100만파운드(530억원)에서 올해 3610만파운드(617억원)로 늘어났지요. 로열 베이비의 상속 재산은 10억달러(1조1000억원)라는 추정도 나오는 판이니, <인디펜던트>의 말이 그저 흘려들을 얘기는 아닌 셈입니다.

영국 <미러>의 한 필진은 “조지 왕자가 중세적인 역할놀이를 집어치우고 ‘페루에서 라마를 기르는 목동’을 꿈꾸는 반역의 정신을 갖기를 축원한다”고 비꼬았습니다. 현재 왕실 가족의 평균수명을 볼 땐 로열 베이비가 옥좌에 오를 수 있는 건 50년 뒤나 됩니다. 군주제는 살아남을까요? 사랑스러운 ‘베이비 조지’는 정말 다른 장래희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정세라 국제부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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