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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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장승수 지음, 김영사, 2007 이 책은 제목이 화두다. 의도가 분명한 책의 운명, 책 내용은 읽기 전후가 ‘같았다’. 20살 청년이 막노동을 하면서 5수 끝에 서울대에 수석 합격. 지은이‘만’ 가능한 개인적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이 책은 174쇄를 찍었고 150만권 넘게 팔렸다. 이 사례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개룡남’(개천에서 난 용)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에 관심이 있다. 다양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공부는 ‘쉽다, 어렵다’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가 쉽다니” 불평하는 네티즌의 ‘망언’론, “너도 할 수 있어” 등은 이 글귀와 무관하다. 공부의 의미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사람의 상황마다 다르다. 나는 세 가지 정도 생각해본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20대 초반, 여름 땡볕의 담배 밭에서 잡초 뽑는 일을 한 적이 있다(‘농촌 활동’). 나는 거대한 옥수수인 줄 알았다. 담배 작물이 2m 가까이 되었다. 그 아래 밭고랑은 천막만한 담뱃잎으로 가려져 바람도 햇빛도 통하지 않았다. 온도는 50도?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을 했다기보다 시간만 채우고 죽기 직전에 기어 나왔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가 쉽구나… 생각했다. 그나마 익숙한 일이 쉽다는 뜻이다. 이 책도 ‘노가다’보다 공부가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도 공부가 익숙한 것이다. 10년 후 서른살. 나는 엔지오에서 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다. 격려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외의 반응에 상처 받았다. 그때만 해도 ‘가난한 아줌마’, ‘운동권 간사’가 일반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은 의문스런 일이었다. 스스로도 죄의식에 시달렸다. 당시 노점상이 분신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의 딸(7살)이 우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나는 며칠 동안 공부하지 못했다. 그런 심리적 갈등에 비하면, 공부는 쉬웠다. 둘째, 공부를 포함 세상의 모든 노동은 다 힘들다. 쉬운 일은 없다. 어떤 노동이든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쉽게 돈 버는 일은 딸바보 부자 아빠가 주는 용돈? 아니면, 합법적 횡령이나 투기? 대형 마트에서 피자 팔기? 문제는 세상 모든 일이 힘든데, ‘입시 공부류’가 가장 사회적 보상이 크다는 것이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성별 분업, 이주노동자가 주로 하는 일… 다양한 노동 분업 체계는 착취와 위계, 특정 분야에 과도한 부와 명예가 편중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부가 가장 쉽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셋째는, 공부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생각하는 것. 최근 임지현은 “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라는 글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가 한 말을 전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 생각, 사랑(관계), 자기 변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다. 나도 조금 생각한 적이 있다. 피학의 쾌락이 있었지만,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에서 기름이 빠져나가는 느낌, 빛이 투과되지 않는 심해에서 괴물과 마주한 기분, 완전한 무기력으로 눈물만 흐르는 상태. 긴장을 견디다 못해 물건(연필)을 부수거나 더 큰 고통으로 상쇄하기 위한 ‘자해’(별로 안 아팠다). 이 우주에 나도 타인도 없는 것 같은 무섭도록 외로운 상태. 단것을 먹어대도 두통만 올 뿐 배가 부르지 않았다. 무기력. 청소와 세수의 반복.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 상승한다. 스스로가 작아지고 우울하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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