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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13 20:21 수정 : 2013.09.13 20:21

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세계화시대의 국가안보>
배리 부잔 지음, 김태현 옮김
1995, 나남출판

나는 이제까지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을 한국전쟁과 황우석 사태라고 생각해왔다. 당시 황우석씨 연구실 근처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어서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들었는데, 처음에는 너무 웃다가 나중엔 “우리(사회)는 미쳤구나”는 비애가 들었다.

이번 ‘내란 음모 상황’도 마찬가지다. 당원 중에 아니(?) ‘RO’ 중에 예비 음모를 구체화할, 레이더에 안 걸리는 스텔스(stealth) 기술자라도 있는지, 최소 오토매틱 자주포(自走砲)라도 구비했는가?(물론, 너무 비싸서 불가능할 것이다).

사극 드라마에 역모(逆謀)가 등장하면 줄거리가 필요 없다. 저런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 내가 지금 살고 있다. 이석기 의원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번 사태와 무관하다. 극단적으로 타자화한다면, 그들은 한반도가 낳은 컬트 집단이다. 만일 <한겨레>를 포함 ‘진보’ 진영 내부의 그들에 대한 비호감이, 이번 국정원 작전에 자신감을 더했다면 희대의 통일전선이 아닐 수 없다.

<세계화시대의 국가안보>는 여성학이나 평화학 계열의 책이 아니다. 정통 국제정치학 논의다. 저자 배리 부잔은 안보 연구를 ‘안보’에서 ‘안보 개념’으로 전환시킨 코펜하겐 학파를 대표하는 이론가다. 안보 개념에 합의란 있을 수 없다(44쪽). 모든 언어에 합의된 정의는 없다. 당연한 말을 왜? 이 땅에서는 예외이기 때문이다. 안보는 대외관계 용어지만 우리에겐 내부 통치용이었다. 말장난이 허락된다면, 내란의 ‘원뜻’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어지러운 세상, 세상이 어수선하다”이고 인간의 보편적 심리 상태가 바로 내란이다.

이 책은 안보의 당위성을 비판하고 개념화 과정의 정치학을 질문한다. 안보의 대상이 되는 인간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국가안보의 주체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이 국가라면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그 안에 사는 개인의 합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개인은 국가안보를 자기 이익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안보는 본질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답을 구할수록 의문이 제기된다. 국방과 안보 사이의 모순, 개인안보와 국가안보의 모순, 국가안보와 국제안보의 모순, 폭력적 수단과 평화적 목적 사이의 모순.

국가안보 연구의 어려움은 국가와 안보 개념 자체의 모호성과 모순에서 출발한다. 국가는 어디, 누구, 무엇인가?(모호성) 집단 간에 서로 완벽한 안전을 지향한다면 오히려 전쟁 확률이 높다는 안보 딜레마가 모순의 핵심이다. 원래 뜻이 모호하므로 증명은 부차적이다. 구체적인 행동이나 논단을 거치지 않아도, 모호한 상징성 자체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언어학에서 말하는 화행(話行, speech act)이 그것이다. “너, 빨갱이지?” 이러면 끝이다. 말 한마디가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사회적 법적 형(刑)을 지게 된다. 내가 이런 의심을 받는다면 이렇게 대응하겠다. “당신이 빨간 안경을 썼으니 세상이 모두 그렇게 보이겠죠”.

안보처럼 정립되지도 다듬어지지도 않은 개념이 맹위를 떨치는 경우도 드물다. 이 책에 의하면 안보는 “미흡한(underdeveloped)”, 옮긴이의 표현은 “저개발된 개념”이다(28쪽). 우리는 워낙 안보 타령 속에 살아서 국가안보가 유구한 개념 같지만,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1년 미국에서이며 1980년대 이후까지도 학파가 형성되지 않았다. 학문이 아니라 통제 규범이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서 “안보는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고 했는데(370쪽), 지나친 언사다. 단지 자신의 공포, 악심, 더러움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만능 무기다. 분노해야 할 것은 국정원의 만행이 아니라 이토록 간단한 무기에 한없이 취약한 한국 사회다.

마침 최근 옮긴이는 모 일간지에 “‘종북’ 세력 제도권 진입, 누구 책임인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민주당이 야권연대로 종북 인사 끌어들여서 정권 잡겠다며 국가 근간 흔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배리 부잔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와 역자의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지만, 역시 안보는 내수용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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