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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17 20:33 수정 : 2014.01.17 20:33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또는 어떤 치한 소묘 습작”
김승옥, <산문시대 4호>, 산문동인 편, 가림출판사, 1963

내 책상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한신 타이거스의 가네모토 도모아키(金本知憲) 선수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재일동포 3세로 일본에서 매우 존경받는 선수다. 얼마 전 은퇴했지만 40대 중반까지 700 게임이 훌쩍 넘는 풀타임 연속 출장을 비롯해 무수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일단 부상이 없어야 가능한데 운동선수의 가장 큰 공포인 부상에 대해 그는 “연습을 많이 하면 부상도 없다(확률이 적다)”고 말한다.

격심한 빈부 격차 시대에 장인(匠人) 지망생의 조건은 어떤 이들에게는 도전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불평등하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몸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은 공평한 부분이 있다. 어쨌거나 몸은 본인이기 때문이다. 립싱크나 대필이 불가능하니 윤리의 마지막 영역일지 모른다.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 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콘텐츠)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분야라고 생각한다.

경기든 연주든 모든 몸의 플레이어들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부상과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습된 몸으로 정신(적 실수)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습, 연습, 연습. 그런 경지의 노력은 명예와 금전적 보장만으로 불가능하다.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에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생산자 입장. 여고 시절 나는 잘난 척하는 아이였다. 또래들이 할리퀸 로맨스에 빠져 있을 때 나는 김승옥을 읽었다. 지금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역사 대하 장편 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냥한 여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담한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들만 있으면 문학도 버리겠다고 장담해본다. 쓴다는 것도 결국은 아편(阿片). 말라만 가고 헛소리를 하게 되고. 아아,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파이프를 물고 소파에 파묻혀 앉은 독자가 되고 싶다.”(403~404쪽)

단편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의 한 장면이다. 22살 때 작품, 어린 천재의 치기와 고단함이 고스란하다. 창작의 고통에 대한 호소일까. 그 다음 문장에 작가 자신의 답이 있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이 문장에 동의한다. 일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열 받지 않아도 되는’ 영화와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름다움만 소비하고 싶다. 비생산의 삶. 죽을 때 연기조차 없는 삶.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제야 이 노래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독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로 사는 피로와 죄악을 피하는 길이다. 호랑이나 사람이나 무엇인가 남긴다? 끔찍하다.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結晶)되어 남을까?”(404~405쪽)

참고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시중에 출간된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에는 “독자가 되고 싶다”는 구절이 누락되어 있다. 출처를 찾느라 네 번 읽었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통해 본 4·19 혁명의 가을>(천정환, 김건우, 이정숙 지음) 참조(331쪽). 이 글의 출전, 동인지 <산문시대>는 서울시 서초구 소재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다. 표지를 넘기니 첫 장에 “梁柱東 先生님-散文同人 김현”이라고 쓰여 있다.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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