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21 20:30
수정 : 2014.03.24 16:23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사회부 24시팀 이재욱입니다. 평소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친기자’에 얼굴을 내밀지는 몰랐습니다.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친절한 사람뿐 아니라 더욱 친절한 기자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참 저는 <한겨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막내 기자랍니다.
요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으로 세상이 무척 시끄럽습니다. 지금 국가정보원이 탈북 화교 출신 서울시 전 공무원 유우성(34)씨를 간첩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조작됐다는 건데요. 아무리 국정원 주요 업무에 ‘대공수사’와 ‘방첩’이라는 것이 있다지만 죄 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 수는 없는 거죠.
오늘은 황당한 국가기관의 간첩식별요령(식별요령)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해요. 국정원이나 경찰청,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에서는 식별요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려요. 시민들로부터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간첩을 신고하게끔 독려하기 위해서죠. 1996년 25명의 남파간첩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들어온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경찰청은 ‘직파간첩 식별요령’을 작성해 일선 경찰에 하달했어요. 식별요령 중에는 ‘집이나 직장 전화번호를 물었을 때 답변을 회피하거나 말을 더듬는 경우’가 있었어요. 당시 간첩이라 오인받지 않으려면 집이나 직장 전화번호를 더듬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야 했던 거죠. 더 황당한 건 ‘여관이나 여인숙 등에 오랫동안 투숙하면서 매춘부를 찾지 않은 경우’라는 부분이죠. 여관에 오래 묵을 경우 간첩으로 의심받지 않으려면 성매매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요. 달리 말하면 마치 남성 장기투숙자들은 늘 성매매를 해왔던 것처럼 이해되네요.
2000년대 초반 국정원 누리집에 올라온 식별요령 중에는 ‘20~30대 청년으로 직업과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휴대폰·자판기·버스카드 사용이 서툰 사람’이 있어요. 직업과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부분도 굉장히 모호하지만 버스카드 사용 못한다고 간첩으로 의심받으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이 무렵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저도 교통카드 사용에 익숙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간첩으로 몰리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위조 또는 타인 명의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거나 발급받으려 하는 사람’도 간첩이라고 의심하라는데요. 타인의 신분증을 소지하거나 발급받으려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이를 가지고 간첩일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요. 장기투숙객은 식별요령 단골손님이네요. ‘특별한 직업 없이 여관, 고시원, 독서실, 하숙집, 관광지 등에 장기 투숙하면서 외부와 연락이 없고 주인이나 종업원과 대화를 꺼리는 사람’도 국정원은 예의주시하라 했습니다. 특별한 직업 없이 인생의 해 뜰 날만 기다리는 서러운 고시생들 의심받지 않으려면 짬을 내 가끔 주인이랑 대화라도 나누라는 건지.
이쯤 되니 이런 어이없는 식별요령으로 무슨 간첩을 잡겠냐고 화가 치미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2010년께 누리꾼 사이에서 ‘식별요령으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대표간첩’이라는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군 자료로 추정되는 식별요령에 들어맞는 정치인들을 묶은 것이었죠. 예를 들어 ‘담뱃값 등 남한 실정에 어두운 자’라는 식별요령에 지난 2008년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버스 타는 데 70원 정도 하지 않느냐”고 말했던 정몽준 의원의 사진이 나란히 실렸죠. 이 글은 박근혜 대통령도 간첩으로 의심했어요. ‘현 정부에 불평불만이 많은 자’라는 항목 아래 정부를 비판하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사진이 실렸거든요. 말이 되냐고요? 물론 안 되죠. 다만 그만큼 식별요령이 자의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국정원이나 기무사 누리집에 들어가면 식별요령을 찾을 수 있지만 앞에 나온 것 같은 어이없는 것들은 대부분 사라졌어요. ‘중국동포·산업연수생 등의 신분으로 입국했음에도 우리말을 능숙히 구사하며 국내 정치·군사에 관심이 많고 체제 비판 지식인, 학원·노동운동권 등에 은밀히 접근하는 사람’ 등 특정 세력에 대한 편견이 짙게 깔린 식별요령이 여전히 존재하지만요.
중요한 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거예요. 바로 국정원의 못된 습관 ‘조작’ 말이죠. 국정원의 전신 안기부는 1987년 남편에게 살해된 수지 김을 간첩으로 조작했어요. 1997년 대선 국면엔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중국 베이징에서 “김 후보가 김정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거짓 기자회견을 하도록 사주하기도 했습니다. 늘 위기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국정원의 조작, 이번엔 대체 어떤 의도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간첩 신고는 국정원이나 기무사 누리집에서 할 수 있어요. 111(국정원)이나 113(경찰), 1337(기무사)로 전화해도 돼요. 그런데 매번 조작을 일삼는 국정원은 대체 어디로 신고해야 그 못된 버릇을 고칠까요.
이재욱 사회부 24시팀 기자
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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