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 지음, 김경주 옮김
지식의숲, 2006
내 책상에는 이 책의 지정석이 있다. 아침마다 눈을 맞추면 기분이 좋아진다. 실화로, 영화화되기도 했는데(<씨 인사이드>) 매력적인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명연기에도 불구하고 내 경우엔 책이 더 좋았다.
생애 한순간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봤으면. 책장마다 간절함과 열정의 불꽃이 튄다. 지은이 라몬 삼페드로 카메안은 스물다섯살에 다이빙하다가 모랫바닥에 머리가 부딪혀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후 27년을 ‘죽은 몸뚱이에 머리만 붙어 있는 사람’, ‘말하는 영혼을 지닌 시체’, ‘만성적인 죽음을 앓고 있는 자’로 살았다.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는 그가 사지마비 상태 이후 형수 등 가족들의 도움으로 살다가, 안락사 권리를 위해 투쟁한 기록이다. 1996년에 출판되었고 스페인어 원제는 <지옥으로부터 온 편지>(Cartas desde el Infierno)다.
안락사나 자살은 의료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윤리다. 그의 처지에서는 불가피한 논리였겠지만 라몬은 안락사 인정의 근거로 개인의 이성, 자유, 인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안락사에 대한 선택의 자유”로 평가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가치들은 무조건 옹호되거나 일반화될 수 없다. 구체적인 상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할 말은 하는 신문”처럼 자유가 넘치는 세력을 위한 논리로 둔갑하기 쉽다. 즉, 자유의 가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어야만 하는 조건이 좌우한다.
책은 활달하고 유머 있는 영민한 사람의 생기가 넘치는데 이 에너지는 죽음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죽음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의욕이 생기는 상태. 그는 안락사를 위해 법, 교회, 언론… 온 세상을 상대로 싸웠다. 그의 생의 절정은 죽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투쟁할 때였다.
안락사를 생명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생명을 무시하는 태도다. 문제의 본질은 생명이 아니라 고통이다. “죽음의 공포는 고통의 공포보다 크지 않다… 공포만한 통치 기제는 없다. 의사의 권력은 환자의 고통에서 나오고 사제들은 죽음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왕은 이 모든 시스템의 우두머리다.”(50~55쪽)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이의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지일까, 의지일까. 현실이 먼저고 규범은 다음 문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의 고통을 볼모로 기존 통념을 수호하려는 것은 인간의 최대 악마성이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되어야 한다.
현대 의학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기도 했지만 생명의 범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생명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문제는 어떤 생명인가이고 생명이 삶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죽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아픈 사람에게서 안도와 우월감, 동정을 느낀다.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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