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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15 20:01 수정 : 2016.01.16 14:51

지난 12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내 단원관에서 열린 제9회 졸업장 수여식 전경. 단원고의 졸업식은 세월호 참사 이후인 지난해부터 1월에 열린다. 올해 졸업식은 ‘비표’를 받은 가족과 학교 관계자들만 입장이 허용됐다. 사진은 졸업식에 참석한 한 인근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았다.

[토요판] 르포
단원고 졸업식

▶ 졸업은 끝이자 시작이다. 헤어짐의 아쉬움과 만남의 설렘이 교차한다. 졸업생들은 흐느껴 울기도, 기뻐 들뜨기도 한다. 양가적 감정이 공존하는 모순된 순간이다. 참사에서 살아남은 아이들도 울고 웃었다. 아픔을 딛고 인생의 새 국면을 맞은 이들의 특별한 졸업식은 평범하게 치러졌다. 다른 한쪽에선 참사의 여진이 진행 중이었다. 실종자가 남았고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고 숨진 아이들의 교실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유가족들에게 졸업은 참척의 슬픔을 견디어야 할 또 다른 하루였다. 끝도 시작도 아니었다.

지난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 해마다 2월에 열렸던 단원고의 졸업식은 ‘세월호 참사’ 뒤인 지난해부터 1월에 열린다. 참사에서 생존한 75명을 포함한 86명의 아이들이 이날 고등학교를 졸업해 사회로 나갔다. 이들에겐 축하받아 마땅한 특별한 졸업식이었지만, 637일 전 아이를 잃고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 유가족들에겐 또 한번 가슴이 무너져내린 날이었다. 이날 단원고와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의 갈대밭 주변엔 종일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었다.

졸업식이 시작되는 오전 10시30분을 앞둔 단원고 정문 들머리에선 꽃다발을 파는 이들이 호객을 하고 있었다. 조화로 만든 파랗고 하얀 꽃다발을 하나 샀다. 교문 바로 앞엔 20~30명의 기자들이 카메라와 함께 반원형으로 둘러섰다. 교문은 철제 울타리로 막혔고, 옆엔 ‘졸업장 수여식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정문을 통제할 예정이니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알림판이 놓였다. 졸업식에 참석하러 온 이들이 말을 구걸하는 기자들을 지나 철제 울타리 사이로 갔다. 경비원과 선생님인 듯한 이가 사람들의 ‘비표’를 확인해 들여보냈다. 파랗고 하얀 꽃다발을 든 채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학교 선생님 되시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한 이는 “졸업생 학부모들이 비공개로 졸업식을 진행하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무색해진 꽃다발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둘러선 기자들 사이에 섰다. “전날 생존학생 학부모들이 유가족 축사도 거부했다더라”고 기자 중 누군가 말했다. 경비원과 선생님은 비표를 보여준 이들에게 연신 “식장 내 촬영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여느 졸업식과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기자들은 오가는 이들의 말을 구걸하며 졸업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이 자리에만 다녀온 ‘창현이 아빠’

길 건너편엔 졸업을 축하하는 펼침막들이 걸렸다. ‘안산의 고3들에게… 졸업을 축하합니다. 별이 된 친구들 몫까지 열심히 사세요. 미안합니다!! -부산대학교 민주동문회’, ‘여러분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많이 아파한 만큼 더 예쁘게 성장했겠지요. 사랑합니다. -멀리서 하동 노란리본 회원 일동’, ‘경기도교육청은 단원고 교실을 있는 그대로 존치하라! -세월호 참사 대전대책회의’.

“평범한 시민”이라 밝힌 한 40대 여성이 늘어선 기자들에게 노란 리본을 단 작은 고리를 나눠줬다. ‘고마워요 응원할게요’, ‘미안해요 다 어른들 잘못이에요’라고 쓴 손팻말을 든 이들이 여성과 알은체를 했다. 잠시 뒤 교문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유가족인 듯한 남성이 카메라를 든 이와 함께 학교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했다. “학교가 국정원이라도 되나? 왜 못 들어가게 하나. 촬영이 싫으면 모자이크 처리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몇 분간 실랑이 끝에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나왔다. 가슴에 ‘창현이 아빠’라고 쓴 플라스틱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아까 왜 그랬나? 기자랑 같이 들어가려던 거였나?”라고 다가가 물었다. 그는 “아니. <나쁜 나라>라고, 우리 다큐영화 찍는 감독이랑 같이 가려는데 카메라가 있다고 못 들어가게 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기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창현이 아빠’ 이남석(51)씨의 얼굴 앞으로 무선마이크와 녹음기, 스마트폰이 몰려들었다.

“무엇보다 즐거워야 할 졸업식인데, 정문에서부터 비표를 확인하고. 유가족들은 참석 안 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비표를 확인하면서 들여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국정원도 아니고 친척이나 이웃들도 와서 축하할 텐데요. 아직 단원고 학생이 4명이나 바닷속에 있잖아요. 유가족들은 나머지 학생들이 다 올라왔을 때 졸업식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창현이 아빠’는 다른 유가족 다섯명과 함께 졸업식이 진행되는 동안 졸업식장이 아닌, 교실 안 각자의 아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고 했다. 기자들이 졸업생들과 세월호 참사로 숨진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주문했다. “축하합니다. 사회에 나가 대학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고 행복한 생활 하고 아픔을 하루빨리 치유하고 잘 적응했으면 좋겠습니다. 창현이가 스마트폰 가지고 게임하는 걸 많이 제재했어요. ‘졸업하면 그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간섭 안 할 테니 그때 자유롭게 살아라’라고 했는데… 창현이가 그런 행복한 삶을 살 수 없게 돼 마음이 아픕니다.”

애초 경기도교육청과 학교 쪽은 세월호 참사로 숨진 학생들의 ‘명예 졸업식’을 이날 함께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모인 ‘416가족협의회’가 거절했다. 일부 학생과 선생님들이 수습되지 않은 만큼, 이대로 졸업식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416가족협의회의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생존 학생들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엔 학교 쪽이 거절했다. 유 위원장은 졸업축사를 페이스북에 남겼다. ‘세월호 304 잊지 않을게’, ‘리멤버 0416’ 등 시민모임이 세월호 참사로 숨진 학생들의 겨울방학식을 지난 10일 열어줬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졸업식을 대신한, 마지막 방학식이었다. 지난해부터 숨진 아이들의 교실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해온 유가족 모임과 재학생 부모들 사이의 골이 깊어진 탓일까. 상처가 상처를 낳고, 갈등이 다시 갈등을 낳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안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기자들에게 졸업식 분위기가 전해졌다. 졸업식은 학교 건물 4층 강당에서 오전 10시30분부터 11시20분까지 50분 동안 진행됐다. 세월호 희생자와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해 학교 연혁과 졸업생들의 진로, 수상 실적 등을 알린 뒤 졸업생들이 선생님들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이어 20분가량 졸업자 87명 모두에게 졸업장이 수여됐다. 졸업장이 나눠진 뒤 재학생 대표인 2학년 학생회장이 송사를, 졸업생 대표인 3학년 학생회장이 답사를 했다. 이어 학교운영위원장과 학부모회장, 동문대표 등 내빈들의 축사와 세월호 참사 뒤 새로 부임한 학교장의 회고사 등이 이어졌다. 교가 제창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단원고 교가.

교실 존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

졸업식에 참석한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식 시작 전 ‘행사 진행 중에 촬영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됐다. 졸업생들은 밝은 표정이었으며, 특별히 우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했다. 또 그는 “내빈들의 축사에서도 안타까웠던 일들이 간단히 간접적으로 언급됐지만, 주로 ‘힘내라’는 내용이었다. 특별한 얘기는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인근 고등학교의 한 선생님도 “간혹 우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흐느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평범한 고교 졸업식이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졸업식 안내장엔 단원고가 설립된 2005년 이후 해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수가 적혀 있었다. 2014년엔 556명, 지난해엔 505명이었다. 올해 졸업생은 세월호 참사와 무관하게 숨진 명예졸업생 한 명을 포함한 87명이었다. 명예졸업생의 졸업장은 아이의 부모가 받았다.

<재학생 대표의 송사>

존경하는 선배님과 선생님, 그리고 이 뜻깊은 자리에 참석해주신 부모님과 내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2학년 학생회장 ○○○입니다. 재학생을 대표해 선배님들의 졸업식을 축하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시 오지 않기에 더 소중한 고등학교 시절의 막을 이제 내리고 성인이 되는 선배님들의 마음 안엔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더더욱 긴 시간이었을 우리 선배님들, 마음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고 잘 견뎌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의 웃음은 곧 친구분들의 웃음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졸업과 함께 또 하나의 새로운 막이 열리더라도 드넓은 세상에서 친구들의 웃음 지켜주시고 어느 누가 뭐라 해도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오늘을 시작으로 더욱 멋지게 거듭나 빛나실 선배님들을 기대하겠습니다. 항상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앞날에 환한 미래와 무궁한 영광과 행복이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선배님들과 다시 만나는 날, 더 나은 서로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선배님들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졸업생 대표의 답사>

역시 올해 겨울에도 눈이 왔고 여전히 춥기만 합니다.

하지만 두 달 후엔 눈부신 햇살과 함께 아름다운 벚꽃길을 걷게 되겠지요. 자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또한 그렇습니다. 모두 다른 중학교를 졸업하고 단원고등학교라는 출발과 함께 새로운 봄을 맞이하였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른 채 서로 어색해하며 인사말을 나누는 것도 잠시

쉬는 시간만 되면 어제 보았던 드라마와 예능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고

매점으로 달려가 주머니 속 동전 털어 간식을 사 먹고

아주 가끔은 야자시간에 땡땡이도 치며 둘도 없는 추억거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세월호 사건이라는 겨울도 찾아왔지요.

혼란스러웠던 병원 생활, 새로운 환경의 연수원,

다시 돌아온 학교 그리고 그 속에서 따라오는 수많은 시선과 비난들

아마 모두에게 너무 길고 힘겨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학창시절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다른 전국의 고등학생처럼 온전히 학업과 꿈에 열중하지 못했다 말할 수도 있지만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역경을 겪었고 그것을 함께 극복하고 성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대학에 가서도 사회를 나가서도 자신 스스로가 강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오전 11시30분이 넘자 졸업식에 참석했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교문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 진을 친 카메라를 보고 어떤 이는 “여기 있지 마라, 다들 후문으로 나갔다”고 소리쳤다. 아이들은 졸업장이나 꽃다발로, 혹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면서 교문의 경비원에게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라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밝아 보이기도, 울먹였던 듯하기도 했다. 여느 졸업식에서나 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단원고에서 도보로 20분가량 떨어진 화랑유원지 내에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가 있다. 이곳에선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다짐의 헌화식’을 열었다. 명예졸업식을 대신하는 일정이었다. 화랑유원지의 갈대밭을 지나 분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헌화식이 끝나 있었다. 한쪽에서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교육청이 ‘우리가 일방적으로 안을 만드는 건 맞지 않는다. 가족들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전문가 도움받아 지난해 9월 안을 제출했습니다. 근데 또 말이 싹 바뀌었어요. 재학생 부모와 희생 학생 부모가 합의를 하라는 거예요….” 숨진 아이들의 교실 존치 문제에 대한 설명이었다. 기자들이 모인 곳 뒤로 졸업장을 든 채 분향소를 찾은 한 졸업생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분향소에 헌화한 뒤 주변 유가족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교복 가슴엔 노란 리본과 ‘우리의 교실을 지켜주세요’라고 쓴 배지를 달고 있었다. 고 신호성군의 어머니 정부자(48)씨가 “졸업 축하해. 잘 살아”라며 반겨줬다. “아이 아버지가 생존 학생 가족모임에서 활동하시는데, 아빠한테 그런대요. ‘아빠가 친구들 죽음의 진상을 꼭 규명해달라’고. 우리 모임에도 자주 와서 이것저것 도와주는, 정말 착한 아이예요.” 흐뭇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정씨의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부어 있었다.

흰 국화를 들고 단원고로 걸어간 사람들

헌화식에 참여한 이들은 흰 국화를 한 송이씩 든 채 줄지어 단원고로 걸어갔다. 행렬을 이끄는 이에게 “몇 명이나 되냐”고 묻자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인데, 우리도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했다. 100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행렬은 화랑유원지를 크게 돌아 단원고까지 매우 느린 걸음으로 걸어갔다. 거의 한 시간이 걸려 학교에 도착한 이들은 숨진 아이들의 교실로 찾아가 가져온 국화를 책상마다 놓았다. 아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방명록에 글을 적고 책상과 교실의 사진을 찍었다. 몇몇은 흐느껴 울었다. 각 반 명패에 ‘우리의 교실을 지켜주세요’라고 쓴 펼침막을 내걸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75명의 아이들은 이날로 온전히 학교를 떠났다. 숨진 아이들의 교실은 아직 그대로 남았지만 다음달 초 단원고에 배정되는 12개반, 300명의 신입생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할지 모른다. 새로운 시작이어야 할 졸업이 누군가에겐 끝내 잊히지 않는, 또 다른 아픔으로 남았다. 단원고 아이들의 졸업식이 열린 지난 12일 이곳엔 종일 세월호 참사라는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었다.

안산/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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