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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16 20:05 수정 : 2017.06.17 00:56

지난 11일 대전 유성구 나인베이스볼구장에서 청주 드래곤이어즈팀 단장 장왕근(28번)씨가 포수 장영태씨와 수어로 대화하고 있다. 언어장애 야구인들은 자신들만의 약속된 표현과 지화를 이용해 야구장에서 소통하고 있다.

[토요판] 르포
모두에게 유용한 ‘야구 수어’

농인 야구인에게 필요한 야구용어
수어사전 등록된 건 10개도 안 돼
같은 팀끼린 몸짓·지화로 통하지만
상대팀엔 불통…판정 항의도 어려워

비야구인들에게도 절실했던 수어
한화 구단이 138개 만들어 보급
장애인에겐 여전히 먼 야구·야구장
“장벽 낮추면 모두에게 도움 될 것”

지난 11일 대전 유성구 나인베이스볼구장에서 청주 드래곤이어즈팀 단장 장왕근(28번)씨가 포수 장영태씨와 수어로 대화하고 있다. 언어장애 야구인들은 자신들만의 약속된 표현과 지화를 이용해 야구장에서 소통하고 있다.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뜻하는 단어가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쉽게 상상되지 않는 환경을 언어장애인들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야구 수어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언어장애인 야구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야구를 해본 사람만이 아는 손맛이 있다. 타자라면, 타석에서 휘두른 방망이에 투수가 던진 공이 정확하게 맞으면 손끝으로 기분 좋은 진동이 전해온다. 딱딱하고 무거운 야구공이 아니라 가벼운 솜뭉치를 툭 친 느낌이다. 이 ‘스위트 스폿’(sweet spot) 맛을 한 경기에 한번만 경험해도 그날은 성공한 날이다. 수비수라면, 우리 편 선수가 던지거나 상대 타자가 친 공이 내 글러브 볼집(글러브의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 그물망 아래쪽) 한가운데 정확하게 꽂혔을 때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스위트 스폿에 공이 맞을 때처럼 아주 기분 좋은 진동이 전해온다.

청각장애가 있는 농인들은 이 손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깡!”(사회인 야구에선 주로 알루미늄 배트를 쓴다) 하는 소리, 글러브에 공이 박히는 “빡!”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능한 외야수들은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 타구의 강도와 떨어지는 지점을 예측해 움직인다고 한다. 이 역시 농인들에겐 불가능한 얘기다. 치고 던지고 달리는 모두에게 평등할 것 같은 야구장 안에서도 농인들에겐 제약이 많다.

들리지 않는 것보다 더 불편한

야구를 하는 농인들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야구장에서 더 집중하고 긴장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집중하고 긴장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농인들은 수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정작 이 수어엔 야구를 하는 데 필요한 용어가 거의 없다. 국립국어원 수어사전에 등록된 2만5000개의 수어 가운데 야구와 관련된 용어는 채 10개가 되지 않는다. 홈런과 세이프, 아웃, 투수와 포수, 타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풀카운트에선 변화구로 승부할 거야”, “3루수나 1루수가 들어오면 번트에서 타격으로 바꿔”, “도루 할 때 피치아웃 조심해”.

야구장에서 팀 동료에게 흔히 할 법한 이 말들을 수어로는 전달할 수가 없다. 풀카운트나 변화구, 3루수나 1루수, 번트와 타격, 도루, 피치아웃 같은 말이 수어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수어가 없다고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적어도 팀 안에서는 나름대로 통하는 약속이 있었고 한글 자모음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는 지화를 이용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약속’들이 상대팀이나 심판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개인별·팀별로 사용하는 표현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심판 판정에 항의를 하기도 쉽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비장애인들이라면 “이번에 스트라이크존이 좌우론 좁아지고 위아래론 넓어졌어요. 타자 무릎에서 허리까지였는데 가슴까지 넓어졌어요”라고 말하면 되겠지만, 농인들에겐 손짓을 섞어서 온몸으로 전달해야만 가능한 식이다.

박대순 대한농아인야구협회 심판이사는 “(야구 용어를 뜻하는 수어들이 없다 보니) 선수들마다 야구 규정을 아는 수준도 제각각이라 경기 중에 설명해야 할 내용이 많다”며 “수화로 시작해서 결국 몸짓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농인 야구인들의 이런 어려움에 공감한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가 지난해 11월 시작됐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구단이 앞장섰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등 야구를 쉽게 즐길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사회공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한화 이글스 마케팅팀 서우리씨는 “야구를 즐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접근성을 높이는 일을 계속 해오던 차에 야구를 하는 언어장애인들이 수어가 없어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얘길 듣고 1년 전부터 준비를 했다”고 설명했다.

농인 야구인과 수어 제작팀이 모여 야구를 할 때 많이 쓰는 말들을 골랐다. 1·2·3루, 야구장 같은 기본적인 용어부터 보크·홈스틸·낫아웃 등 세부적인 말들도 포함됐다. 실제 경기 중에 많이 쓰이면서 동시에 야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용어들도 추렸다. 이들 야구 용어를 수어로 바꾸는 데 6개월 가까이 걸렸다.

한화 이글스는 지난달 29일 이 야구 수어들을 공개했다. 138개 수어 교육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고(https://goo.gl/vw2wND) 수어 사전도 제작했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글스 페이스북 페이지엔 “정말 의미있고, 칭찬받아 마땅한 프로젝트”, “다른 구단이 배워야 함”, “이제 야구만 잘하면 된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6월1일부터 네이버 해피빈 공감펀딩을 통해 후원금도 받고 있는데 마감을 10일 앞둔 15일 현재 5470만원이 모금됐다. 목표 금액 300만원의 1800%에 이른다. 펀딩으로 모은 후원금으로 야구 수어 사전을 만들어 단체와 농인 야구팀 등에 나눠 줄 예정이다.

야구장 밖에서 더 필요한

지난 11일 대전시 유성구의 한 야구장에서 열린 청주 드래곤이어즈팀과 화성 다이노스팀의 연습경기를 찾아갔다. 둘 다 농인들로 구성된 팀이다. 새로 만든 야구 수어의 쓰임새를 평가하려면, 야구 수어가 없는 상황에서 농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공을 치고 받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선수들의 기합 소리를 빼곤 경기는 조용하게 진행됐다. 사회인 야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자 집중해!”, “괜찮아!”, “땅볼은 가까운 베이스” 따위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를 제외하면 비장애인 야구 경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걱정’과 달리 경기 중에 상대팀이나 심판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진 않았다. 경기 중반 다이노스팀의 투수가 투수판에서 발을 떼지 않고 3루 견제를 하는 반칙(보크)을 했는데, 이를 설명하느라 심판이 몸소 시범을 보인 상황 정도가 있었다.

사실 경기장에서야 2루수라는 수어가 없어도 2루수를 가리키면 되고, 당겨치거나 밀어쳐라는 말은 3루나 1루를 향해 방망이 휘두르는 시늉을 하면 뜻은 통한다. 정해진 규칙과 사인으로 진행되는 게 야구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청각장애인들도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게 야구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날 대승을 거둔 드래곤이어즈팀의 누군가가 다음날 회사 동료를 만나 하루 전의 경기에서 자신의 활약상을 설명할 땐 어떨까.

“사회인 야구를 하는 한 농인 선수가 자신이 친 2루타 덕분에 팀이 역전승을 했대요. 기분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집에 가서 아내에게 이걸 자랑하고 싶은데 설명하기가 어렵더래요. 당연히 아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한화 이글스가 야구 수어를 만들기 전 한 농인에게 들은 얘기라고 한다. 이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어쩌면 야구 수어가 야구장이 아닌 야구장 밖에서 더 필요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전날 야구 경기 결과를 확인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야구팬이라면 더 실감이 갈 것이다. 그 기분 좋은 소식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다면?

농인 야구팀 안산 빅토리의 단장 김정아씨는 “야구를 하는 농인들 못지않게 야구를 하지 않는 농인들에게도 이번에 만들어진 야구 수어가 필요하다”며 “이들이 수화로 야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엔 25만명의 농인이 있고 14개 농인 야구팀이 있다.

비장애인들이 언어장애인들과 소통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날 경기장에서 만난 드래곤이어즈팀 김준호씨의 아버지 김태주씨는 야구 수어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반가워했다. 김씨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깔린 수화가이드 앱을 보여주면서 “수화를 배워도 사용하지 않다 보니 금방 잊어먹는 경우가 많았다”며 “아들과 야구 얘기 하기도 어려웠는데 하나씩 배워봐야겠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위한, 결국 모두를 위한

지금은 너무 익숙해서 당연해 보이지만 야구 초창기 심판들의 판정은 수신호 없이 소리로만 했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선 1900년대 초반부터 심판들이 수신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수신호가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윌리엄 호이(더미 호이·1862~1961)라는 청각장애인 메이저리거다.

호이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청각장애인 선수로 3살 때 뇌수막염을 앓은 뒤 청각을 잃었다. 170㎝, 72㎏으로 야구선수로는 외소한 체격이었지만 빠른 발로 도루와 득점에 능했다. 1888년부터 13시즌을 뛰며 555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그는 스트라이크나 볼 같은 심판의 판정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3루 베이스 코치에게 손가락으로 이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손가락 하나는 스트라이크, 둘은 볼 같은 식이었다. 호이가 야구 수신호의 창시자로 인터넷 등에 소개되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호이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기 전부터 수신호가 사용됐고, 관중과 외야수들이 심판의 판정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수신호가 도입됐다는 주장도 있다.

야구 수신호의 탄생에 호이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든 하지 않았든,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수신호가 유용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만약 오늘날 야구에서 심판이 오로지 소리로만 판정을 한다면 청각장애인은 물론이고 비장애인도 관람하는 데 큰 불편을 겪을 것이다.

저상버스나 경사로 등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 중에 비장애인에게 불편을 주는 것은 없다. 오히려 비장애인들에게 유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800만 관중을 넘었지만 야구장은 여전히 장애인들에게 멀고도 불편한 장소다. 경기 중 파울볼이 관중석으로 날아오면 해당 구역에 배치된 안전요원들이 호루라기를 불어 알리는데, 정작 청각장애인들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대표적인 예다.

드래곤이어즈팀 단장 장왕근씨는 “농인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눈으로 봐야 한다.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야구를 하면서 가장 불편한 점”이라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에게 파울볼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쉽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비청각장애인이 파울볼을 피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농인들은 야구 수어가 그들의 불편함을 비장애인들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박대순 심판이사는 “비청각장애인들에게도 야구 수어가 알려져서 조금 더 자주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야구 수어가 농인들에게만 유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덧: 17일부터 이틀 동안 경기도 안산시 배나물야구장과 해양야구장, 신길야구장에서 제8회 전국농인야구대회가 열린다. 드래곤이어즈와 다이노스, 충주 성심학교 등 10개 팀이 출전한다. 농인들의 사회인 야구에서 성심학교 야구부 졸업생들은 ‘선출’(선수 출신)로 대우하며 때로는 섭외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당연히 선출들의 실력과 팀 전력은 절대적으로 비례한다. 대회에서 선출은 나무방망이, 비선출은 알루미늄 방망이를 사용한다.

대전/글·사진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참고 자료

더미 호이가 수신호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나?(Did umpires develop hand signals because of deaf player Dummy Hoy?) <엘에이 타임스> 2012년 1월10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더미 호이(www.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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