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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행사 기념공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출연한 한 배우가 대형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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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보수’ 태극기 개당 500원
올해 3·1절 게양률 역대 최저
국기법 있지만 유명무실
월드컵 특수 뒤 중국산에 밀려
깃봉 없는 비닐깃발 100% 중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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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행사 기념공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출연한 한 배우가 대형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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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뉴스분석, 왜? 탄기국 태극기의 ‘국적’
인터뷰를 마치고 얻어온 태극기를 책상 모니터에 붙였습니다. 창문 없는, 구석진 사무실엔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축 처진 태극기를 보고 지나는 동료가 한마디 합니다. “‘탄기국’으로 전향?” “허허허.” 머쓱해져 웃습니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인데 요즈음 태극기는 대한민국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상징의 힘을 잃은 깃대가 처량합니다. 어쩌다 한 나라 국기가 이런 신세가 됐을까요?
지난해 12월 다음카페 ‘박사모’에 올라온 글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안 통과 뒤 시위가 한창이던 때다.
“좌빨 촛불시위 참가한 평생 공짜 인생살이하는 놈들은 국민들 세금이지만 공짜 물량과 금전 세례 받으며 환장하고 집단 체면(최면) 당해서 광란의 짓을 하고 있는데 반하여 우리 애국시민들은 태극기 수기(손깃발) 1개도 공짜로 받으면 안 됩니다.”
오자도 많고 문장도 길다. 독해도 어렵다. 요지는 집회 필수품인 태극기 정도는 각자 알아서 준비하자는 독려다. 촛불집회가 그렇듯, 박사모들도 후원을 받아 집회를 꾸린다(라고 주장한다). 글쓴이 ‘봉황’은 “1차 집회 후에 박사모 카페에 후원금 사용내역 공지한 것을 보니 일회용 수기 태극기 구입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일회성 태극기 구입을 각자가 해결해야함을 알리고 싶었다”라고 길게 이유를 밝혔다. 500만명(‘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쪽 최근 주장)씩이나 참가하는 집회다. 태극기 구입비도 만만찮았을 것이다.
박사모 카페엔 올해 1월 후원금 입출금 내역이 올라와 있다(2월 이후 정산내역은 없다). 수입은 8억552만원, 지출은 7억6809만원. 태극기 구입에는 1520만원을 썼다. 한 번에 5만개씩 세 차례에 걸쳐 15만개를 샀다. 하나당 500원꼴이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한 손에 드는 작은 태극기다. 참가자 500만명이 들기엔 턱없이 모자란다. 나머지 태극기는 어떻게 준비했을까?
“옳소.” “전 ×마트에서 샀는데 아주 좋아요.” “무료로 나눠주는 종이국기는 몇 번 흔들면 찢어져 남들보기 흉합니다. 마트에서 천으로 된 것 구입하니 태풍이 불어도 튼튼합니다.” “보수라면 집 앞에 거는 큰 태극기, 집회 때 사용하는 작은 태극기 정도 장만은 기본입니다.”
보수의 자비량 정신을 촉구하는 ‘봉황’의 글엔 긍정적 댓글이 많았다. 각종 ‘태극기 구입기’도 잇따랐다. 댓글대로면, 덕분에 태극기를 찾는 이들이 늘었어야 한다. 실제로 그럴까. 온 나라가 어수선한 와중에, 태극기 제조업체들은 ‘애국보수’의 은총이 내린 특수를 맞았을까? 애국보수들이 ‘기본’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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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은 서울 시민들이 남산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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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역설
태극기 판매업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한 해 중 사람들이 태극기를 가장 많이 찾는 날은 3·1절과 광복절이다. 날짜상으로 앞선 3·1절이 특히 그렇다. 한 번 내걸고 버리지 않는 이상 5개월 뒤 다시 쓰면 된다. 한데 98주년이었던 올해 3·1절엔 태극기를 찾는 이들이 전보다 줄었다. 특수는커녕 매출도 타격을 입었다.
강원도 춘천에선 태극기 게양률이 역대 최저였다. 춘천시 학원연합회가 3·1절마다 시내 주요 아파트 단지를 대상으로 태극기 게양률을 조사해왔는데, 올해 18.1%였다. 한 해 전보다 5.5%가 줄었다. 학원연합회가 게양률 조사를 시작한 1998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태극기 게양에 적극적이어야 할 지방자치단체들도 이번엔 달랐다. 서울 종로구는 이달 구 소식지 표지 후보로 태극기를 올렸다가 최종심의에서 뺐고, 유관순의 고향 충남 천안시는 ‘만세 삼창’ 행사 때 늘 들던 태극기 없이 카드섹션으로 대신했다. 광주광역시는 기념행사 때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무료로 나눠 주기로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 주로 온라인으로 태극기를 파는 부산 소재 동아기업의 한 관계자는 13일 “탄핵 반대 쪽에서 태극기를 주로 사용하다 보니 이번 3·1절은 태극기가 별로 반갑지 않게 됐다. 태극기 달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분위기였다”며 “매출에도 영향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애국보수’들이 외려 태극기의 인기를 끌어내린 셈이다.
사실, 태극기 게양률이 10%대로 내려앉은 지는 오래됐다. 2000년대 들어 두드러졌다.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시기마다 언론이나 시민단체들이 알아본 바가 그랬다. 2002년 월드컵 때 잠깐 ‘반짝 특수’를 누렸을 뿐이다. 14일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만난 이래원(73) 대한민국국기홍보중앙회 회장은 “군부 정권을 겪은 후유증일 수 있지만, 돌아보면 문민정부 이래 태극기 게양률은 저조했다. 자율로 바뀌면서 그리됐다. 지금은 국민들 사이에 태극기를 게양하겠단 의지가 없다. 소장만 하고 걸지 않는다. 탄핵 정국은 일종의 핑계”라고 했다.
이러다 보니 아예 지자체장이 선거 공약으로 태극기 게양 확산을 들고나오기도 한다. 서울 강남구는 2011년부터 동 자치센터를 중심으로 태극기를 무료로 나눠 주고 건축사협회 지원으로 아파트 단지에 게양대를 설치해주는 일을 했다. 덕분에 일부 시범단지로 지정된 아파트에서 게양률이 85%에 이르기도 했지만, 이는 특정 지자체가 억지추동한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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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스페인의 월드컵 8강전이 열린 2002년 6월22일 광주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태극기를 펼쳐 들고 열광적으로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다. 광주/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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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법을 아시나요
태극기가 관습적·임의적 상징만은 아니다. 모르는 이들이 많지만 ‘대한민국 국기법’이란 근거법도 있다. 법은 태극기의 제작과 게양, 관리 등을 동일한 방식으로 하게끔 규정해놓았다. 국기법 7조 4항은 ‘국기의 깃봉은 아랫부분에 꽃받침 다섯 편이 있는 둥근 무궁화봉오리 모양으로 하며, 그 색은 황금색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깃봉 봉오리는 실제론 대부분 은색이다. 관공서에 내걸린 깃봉들도 그렇다. 색이 틀렸다 지적하는 이도 없다. 국기법 10조 3항은 태극기가 훼손됐을 경우 ‘지체 없이 소각 등 적절한 방법으로 폐기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도심에서 태극기를 소각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데다, 법은 ‘국기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관리하여야 한다’면서도 소각 이외의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국기법의 존재가 유명무실하듯 태극기는 산업적 측면에서도 존재감이 없다. 국내에서 태극기를 직접 제조하는 업체는 부산의 대한섬유(직물염색), 대전의 동산기획(실사) 등 3~4곳 정도다. 나머진 모두 이들을 통해 오이엠(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생산을 하거나 원단을 받아 재가공해 파는 소매상들이다. 태극기만 만드는 공장은 아예 없다. 염색은 폐수 처리가 필요해 섬유공단 안에서 해야 하는데, 수요가 없으니 태극기만 만들어서는 운영이 안 된다. ‘태극기 제조 과정을 보고 싶다’고 요청하자 한 염색공장 관계자는 “주문이 오기를 기다린 뒤 제조 날짜와 시간에 맞춰 기계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태극기는 수요가 일정한 제품이라 홍보를 한다고 더 팔리거나 하지 않는다. 태극기의 생산·유통 관련 수치가 ‘비밀 아닌 비밀’인 이유”라고 말했다.
‘플래그몰’이란 태극기 판매회사를 만들어 운영 중인 이래원 회장은 “1989년부터 태극기 단체를 만들어 활동해왔는데 마땅한 수입이 없어 사무실을 계속 줄여왔다. 자생하자는 취지에서 판매일도 시작해 2002년 월드컵 때부턴 종로 파고다공원 앞에서 좌판을 벌였다. 그해 ‘태극기가 모자라네’, ‘잉크가 없네’ 아주 난리였는데 그렇게 반짝하고 말았다. 천안함 때(2010년) 15m짜리 태극기를 만들어놓은 게 있는데 아직도 안 나간다. 태극기 제조회사 한 곳은 얼마 전 거의 폐업 상태까지 갔다 겨우 회생했다. 중국산 저가 태극기 영향으로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했다.
국내에서 태극기 생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이, 시중엔 어느새 중국산 태극기가 넘친다. 중국산은, 태극기가 특수를 누렸던 2002년부터 보따리상 등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국산보다 염료와 천의 질이 떨어지고 빨강·파랑 문양이 겹쳐 있거나, 태극과 괘의 규격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탄핵 반대 집회에 나선 ‘애국보수’들이 흔드는 태극기 대부분은 중국산이다.
이래원 회장은 “태극기 집회에서 흔드는 손깃발의 90% 이상이 그렇다. 국산은 그 가격에 만들 수가 없다. 깃봉도 제대로 없는 비닐 손깃발은 국내에선 아예 만들지 않는다. 그걸 모르고 흔드는 거다. 미국 일부 주에는 ‘국기는 외국에서 수입해선 안 된다’는 법도 있는데 왜 우리는 그냥 놔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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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담벼락에 박 전 대통령 지지자가 태극기를 붙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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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위 박근혜 사진
법은 존재감이 없고, 시중엔 중국산 태극기가 넘쳐나지만 정부는 국가주의 우려를 낳는 관 주도 전시행정에만 몰두한다. 실제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 정부가 국기달기 운동을 추진했지만 “독재국가적 발상”, “나라가 자랑스러우면 저절로 들 것”이라는 반발이 나왔다. 담당부처는 손을 놓고 있다. 태극기 등 국가 상징에 관한 사무는 행정자치부 의정담당관실이 맡는다. 지난 3·1절 행자부는 늘 해오던 대로 독립유공자 등을 모아놓고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그러곤 중앙행정기관과 공공기관 소속 공무원, 산하기관 임직원을 대상으로 태극기 달기를 ‘공문으로’ 독려했다. 지자체엔 아파트 구내방송이나 소식지를 통해 태극기 달기를 홍보해달라고 ‘공문으로’ 요청했다. 그뿐이었다. 각 기념일에 행자부가 내는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 추진계획’을 보면 제목과 날짜만 바뀐 채 똑같은 내용이 수년째 반복된다. 실제 태극기 게양이 어느 정도 이뤄지는지, 국내 태극기 제조업체 현황이 어떤지, 중국산 태극기가 어느 정도 유통되는지 정부는 알지 못한다. 행자부 의정담당관실 담당사무관은 1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태극기 게양률을 조사하거나 태극기 생산업체 현황을 따로 파악하진 않는다. 2013년 즈음부터 지자체 대상으로 구입한 태극기가 국산인지 아닌지 정도를 확인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태극기가 국가 상징으로서 권위를 잃어가는 데엔 무엇보다 최근 ‘태극기 집회’의 공이 컸다. 박사모 등은 태극기를 촛불에 맞선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촛불과 탄핵에 반대하는 것, 부정을 저지른 대통령을 지키는 일을 국가를 수호하는 일과 동일시한다. ‘최선을’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탄기국’ 다음 카페 회원은 지난 1월 카페에 “태극기 판매 업체에 전화해 ‘집회 때문에 태극기가 잘 팔릴테니 후원을 부탁한다’고 했다가 ‘우리는 반대쪽’이라는 얘길 들었다”며 글을 올렸다. 이 글엔 “그런 놈들이 태극기는 왜 만들어 파나”, “반대쪽이면 태극기 제작은 왜 하고, 태극기는 왜 파나”라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 태극기를 아예 자신들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이들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다.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는 지난 3·1절 즈음해 “태극기를 시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태극기의 신성함을 해치는 행위”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광복회는 “지난날 우리 독립운동 선열들은 태극기 아래에서 일제를 응징하는 비장한 결의를 다지셨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태극기를 몸에 숨겨가며 독립투쟁을 펼치셨다”며 “그런 태극기가 특정이익을 실현하려는 시위 도구로 사용된다면, 태극기를 소중히 여기셨던 선열들에 대한 예의도, 도리도 결코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관련 법안도 발의됐다. 권은희 국민의당 의원은 “최근 태극기가 탄핵 반대의 상징처럼 사용되면서 태극기 활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진다”며 지난 9일 집회와 시위에서 국기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의 국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사용 목적을 제한하면, 국기의 실추된 권위가 살아날 수 있을까.
이래원 회장도 “옳지 않은 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월드컵 때 젊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몸에 걸고 다녀도 뭐라 하지 않았어요. 그건 순수했으니까. 근데 이번엔, 냉정하게 얘기해서 옳지 않은 일에 쓰이는 거예요. 법치국가엔 법이 있고, 법에 따라 잘못된 것이라 판단했고, 통치자가 실제 잘못을 했고, 그에 따라 물러난 건데 잘못된 부분을 잘못됐다 하지 않고 그걸 옹호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있는 거거든. 게다가 태극기는 원래 가장 맨 위에 게양해야 해요. 근데 이 사람들은 박근혜 사진 아래에 태극기를 걸더라고. 그게 말이 됩니까? 국기를 가장 위에 거는 게 예의잖아요. 사훈, 교훈 다 태극기 아래에 있잖아요.”
박사모들에게 박근혜는 국가 위의 존재다. 한 개인이 국가 위에 군림하는 나라를 바라고 꿈꾸는 이들이 ‘공화국’ 대한민국의 국기를 상징으로 쓰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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