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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일가가 사정기관의 전방위 수사를 받으며 사면초가에 빠졌다. 왼쪽부터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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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대한항공 조씨 3대가 사는 법
조중훈 ‘트럭 한대’ 신화 뒤엔
박정희·전두환 정권과 밀월관계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 대일 로비
“전두환은 피로를 모르는 사나이”
위기 시 퇴진 선언 뒤 복귀 반복
인허가권 공무원 뇌물로 관리
교통부 차관 딸 이명희와 혼인
변칙증여·탈세도 대 이어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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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일가가 사정기관의 전방위 수사를 받으며 사면초가에 빠졌다. 왼쪽부터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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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셋째인 조현민씨가 던진 물컵이 조씨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로 번지고 있다. 업무방해, 폭행, 밀수, 탈세 등의 혐의를 두고 검찰과 경찰, 국세청, 관세청이 일제히 나섰다. 조씨 일가의 일탈은 일회적인 것일까. 한진그룹의 창업주인 조중훈부터 시작해 아들 조양호, 3세인 조현아·조원태·조현민까지 이어져온 ‘그들이 사는 법’을 들여다봤다.
국세청이 처음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자 명단을 만든 1969년, 종합소득 1위는 누구였을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아버지인 조중훈 한진상사 대표(이하 호칭 생략)였다. 조중훈의 한해 소득은 3억2246만원. 삼양라면 한개에 20원인 시절이다. 당시 소득 순위 2위, 5위, 11위를 한진상사 중역들이 차지했으니 한진의 전성시대라 불릴 만했다. 조중훈은 그해 12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업은 아름다운 것이다. 한 젊은이가 사업에 평생을 바친 이유다. 돈은 그 부산물이었다”고 말했다.
‘한민족의 전진’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한진의 전성기는 전두환 정권 시절까지 이어졌다. 조중훈은 줄곧 소득 1위를 유지하다 1970년대 후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잠시 1위를 내줬지만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대 초반 다시 1위를 탈환했다. 1990년대 들어 소득 순위 상위권에서 조금씩 밀려나긴 했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정주영과 1·2위를 다퉜다. 조중훈의 성공 뒤에는 박정희·전두환 정권과의 ‘밀월관계’가 있었다.
조중훈의 손녀딸이자 조양호 회장의 셋째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업무에 대한 열정 때문에” 던진 물컵의 파장이 조씨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로 번지고 있다. 조현민에 대한 업무방해 혐의로 시작된 수사는 조양호 회장의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의 공사장 직원 폭행, 가족 단위의 정기적인 밀수, 조양호의 상속세 탈루 사건 수사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검찰과 경찰, 국세청, 관세청이 조씨 일가를 둘러싼 형국이다. 이번에 드러난 조씨 일가의 행태는 창업주의 업적을 망각한 후손들의 일회적 일탈일까. 혹시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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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금탑산업훈장을 받고 있다. 출처: 조중훈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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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과 관계 맺는 법
재계에서 조중훈은 ‘트럭 한대로 시작해 비행기로 날개를 단 신화적 기업인’으로 묘사된다. 조중훈은 1945년 11월 한진그룹 시초인 운수업체 한진상사를 차렸다. 한국전쟁 뒤 미군 보급물자 수송 수요가 급증하며 크게 성장한 한진상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파병에 따른 수송 용역 사업 계약을 독점하며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항공의 전신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것도 이 무렵이다.
운송업의 중요성을 빨리 간파한 사업 감각, 한국전쟁 전후 미군 인맥을 오랫동안 끈끈하게 관리한 수완, 종합물류기업으로 한길을 걸어온 뚝심 등이 조중훈이 그룹을 키운 비결로 꼽히지만, 그의 ‘영업비밀’은 한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박정희 정권과의 남다른 ‘스킨십’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국사 경내를 두루 살피면서 조중훈 한일개발(한진건설 전신) 회장이 기증한 ‘박정희 대통령 각하 만수무강’이라고 새겨진 범종을 두번 타종한 뒤 ‘이 종소리의 여운이 몇 분이나 울리느냐’며 시계를 보기도 했다.”(1973년 7월4일 <동아일보>) 흔히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을 본떠 만든 ‘박정희 신종’을 기증한 것이다.
조중훈이 박정희의 가장 큰 신임을 받은 계기는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 무마 로비’로 꼽힌다. 재미언론인 문명자는 1977년 3월 일본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에 두차례에 걸쳐 사건의 내막을 폭로했다. 문명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조중훈은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일주일 뒤인 8월15일 청와대에 불려가 박정희로부터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일본 인맥을 활용해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로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조중훈은 대한항공 주식을 10% 갖고 있던 일본 기업인을 통해 다나카 총리에게 총 3억엔을 제공해 박정희 정부가 사건을 진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조중훈은 전두환 정권과도 좋은 호흡을 보였다. 선거운동 때부터 활약이 두드러졌다. 1981년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치러질 예정이었던 제1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중훈은 전두환 당시 후보에게 공개적으로 줄을 섰다.
“조중훈 회장은 네번째 연사로 나서 ‘항공회사 사장으로서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를 수행, 어제 저녁에 돌아왔다. 10여일간의 강행군에도 전 대통령은 피로를 모르는 사나이였다. 무소속이지만 전 대통령을 지지한다. 지금까지 전 대통령 이외에 다음 대통령이 될 만한 대타를 찾아본 적도 없고, 또 느껴본 적도 없다. 서슴지 않고 전 대통령에게 한표를 던지겠다’고 선언해 박수를 받았다.”(1981년 2월9일 <매일경제>)
조중훈은 1981년 2억원, 1982년 3억원의 새마을성금을 기탁해 전두환으로부터 친서로 치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훗날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에서 밝혀진 뇌물 액수에 견주면 소소한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사건 판결문을 보면, 조중훈은 두 대통령에게 수백억원을 제공했는데 대가는 ‘여객기 추락 사고에 따른 불이익 방지, 세무조사 무마, 아시아나항공보다 차별적 우대 요청’ 등이었다.
아들인 조양호는 2002년 11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쪽에 20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2004년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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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4년 12월12일 낮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과 관련해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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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일선 퇴진’ 요구에 대처하는 법
조중훈은 1970년대부터 크고 작은 항공 사고 등으로 책임론이 제기될 때마다 표면적으로 2선 후퇴를 밝히고 막후에서 경영권을 행사하다 여론이 조용해지면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운송업계 이권을 독식하면서 ‘운송업계의 독재자’라는 비판이 거세지던 1970년 8월2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55세가 되는 4년 뒤에는 퇴진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4년 뒤 퇴진은 없었다. 1989년 1월12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는 “경영권을 언제 넘길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살아서는 어려울 것이다. 창업자는 은퇴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장 큰 ‘시련’은 김대중 정부 시절 닥쳤다.
“항공사는 사기업이지만 국민이나 전세계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기업이나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은 오너 경영의 실패를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근본적으로 전문경영인이 나서야 한다.”
최근 나온 발언 같지만, 1999년 4월21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이다. 당시 대한항공은 1998년부터 1년 동안 10여 차례나 되는 잦은 항공기 사고로 국내외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에 김 대통령이 작심 발언을 한 것이다. 다음날인 4월22일 강봉균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기자간담회에서 “대한항공이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추길 거부하면 법과 제도상 가능한 모든 제재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강봉균의 강경 발언이 나온 이날 조중훈은 대한항공 회장 자리를 당시 조양호 사장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한진해운과 한진 등 그룹 5개 계열사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대통령까지 나섰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는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물려받은 대한항공 회장 자리를 19년간 유지한 조양호는 최근 일련의 사건으로 다시 경영권 포기 요구에 직면했다. 그는 지난달 22일 대국민 사과 때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밝히고, 그 일환으로 진에어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대한항공도 아닌 한진 계열사 중 덩치가 작은 편인 진에어의 대표이사직인데다, 그마저도 등기이사직에서는 물러나지 않음으로써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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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이 부인 이명희(왼쪽), 딸 조현민(오른쪽) 등 가족과 함께 2012년 7월 런던올림픽 기간 중 런던 엑셀 경기장에서 탁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런던/올림픽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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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아끼는 법, 공무원을 관리하는 법
조씨 일가는 김대중 정부에서 경영권은 지켰지만 사정당국의 칼날을 피하진 못했다. 1999년 국세청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이를 통해 1990년 이후 조중훈이 조양호 등에게 분야별로 경영권을 분할 계승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변칙 증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한항공의 민낯을 보여주는 수상한 돈의 흐름도 포착된다. 대한항공이 항공운수업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당시 건설교통부와 항공청 공무원들을 돈으로 관리해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조양호는 당시 손순룡 서울지방항공청장에게 1996년부터 2년간 매달 300만원씩 제공하는 수법으로 총 6600만원을, 김진열 부산지방항공청장에게는 1993년부터 4년간 12차례에 걸쳐 현금 1200만원과 3천달러, 해외연수 ‘장도금’ 3천달러를 뇌물로 줬다. 손순룡은 2001년 12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뒤 몇 달 만에 한진그룹 산하 한진물류연구원 원장에 취임했다. ‘대한항공을 비호하다 공직에서 물러나도 대한항공이 책임진다’는 ‘의리’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최근 조씨 일가가 외국에서 사들여 온 물품들이 수십년 동안 세관의 검사 없이 입국장을 빠져나갔다는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의 제보가 잇따라 관세청이 수사 중이다. 과거 그 일각이 드러났던 대한항공과 규제당국의 공생관계는 지금도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
대한항공이 규제당국을 관리하는 방식은 단순히 돈이나 일자리뿐이 아니었다. 가장 끈끈한 동맹관계인 ‘혼인’도 동원됐다. 최근 직원들에 대한 폭행으로 수사 대상에 오른 조양호의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1973년 결혼 당시 이재철 교통부 차관의 맏딸이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장관이 3명 바뀌는 동안 이재철은 5년간 차관 자리를 지켰다. 이재철은 1976년 차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곧장 한진그룹 산하에 있던 인하대 총장에 취임했다.
일우재단의 설립 뒤에도 조씨 일가의 재산 형성 노하우가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조중훈은 박정희 정권 시절 축산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목장 경영을 권유받아 제주도 제동목장을 매입해 관리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들어 이른바 ‘5·8 조치’(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 매각 실시)로 제동목장은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판정된다. 이에 조중훈은 제동목장을 사돈인 최현열(고 조수호 한진해운 전 회장의 부인 최은영의 아버지)이 이사장으로 있는 ‘21세기 한국연구재단’에 기부한다. 소유권을 재단에 넘겼지만 사돈 재단에 넘김으로써 운영권은 실질적으로 조씨 일가가 행사했다. 재단 기부에 따른 증여세 감면 혜택의 효과도 누렸다. 최현열은 1992년부터 재단에서 부동산 임대 사업을 시작한다. 1995년 조양호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2009년 이명희가 이사장으로 앉으며 재단 간판을 일우재단으로 바꿔 달았다. 제동목장은 돌고 돌아 조씨 일가의 수중에 다시 들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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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컵 갑질’로 물의를 일으킨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조사받기 위해 지난 1일 오전 서울 강서경찰서로 출석하다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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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조현민은 2014년 10월 <에스비에스>(SBS)의 한 아침 방송에 출연해 “대한항공에 입사했을 때 (상사에게) ‘낙하산은 맞지만 광고 하나는 자신있다’고 말했다”고 털어놨다. 조현민의 이 말은 그로부터 22년 전 조양호가 대한항공 사장에 오르며 한 말과 닮았다. “재벌 2세로서 가만히 앉아 중책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992년 3월11일 <동아일보>) 이들은 자신들이 ‘경영수업’을 통해 충분한 경영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했겠지만, 이들이 배운 것은 경영 능력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온 각종 ‘영업비밀’이 아니었을까.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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