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0 09:07
수정 : 2019.08.10 10:11
[토요판] 이슈
WTO 개도국 지위 논란
1994년 국회서 WTO 가입 비준
이후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
트럼프 “한국 등 개도국 벗어나야”
포기 시 농산물 관세 대폭 낮춰야
한미FTA로 이미 개도국 모순 발생
“소농을 위한 새 국제규범 창출해야”
|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지난해 9월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해 볏단과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들은 밥 한공기 300원에 해당하는 쌀 80㎏ 기준 24만원 수준의 목표가격 인상을 요구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 아베 총리의 무역보복에 온힘을 다해 맞서는 한국에 또 다른 암초가 등장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무역기구(WTO)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개도국 지위에서 벗어나면 농산물의 관세를 낮추고 정부 보조금을 줄여야 한다. 한국 소농의 생존권이 흔들릴 수 있는 일이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가 개도국 지위 논란과 대응방안을 짚어봤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비준 동의안이 몇장짜리인데 하나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다.”
1994년 12월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세계무역기구 가입 협정 비준을 표결하면서 당시 국회의원 이길재는 의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그날 누구도 한국에서 소농들이 우리 농산물 학교급식 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며, 세계무역기구가 거기에 급제동을 걸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2년 학교급식 사고가 잇따라 터지자 전북의 소농과 시민들은 ‘전북학교급식조례 제정을 위한 연대회의’를 조직했다. 전북의 학교에서 전북산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학교를 전북교육청이 지원하도록 독려하는 게 핵심 활동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농촌 방방곡곡에 우리 농산물 급식 조례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내용도 ‘우리 농산물 무상 급식’으로 심화됐다. 하지만 대법원은 2005년 전북학교급식조례를 무효로 만들었다. 학교급식에 우리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했기에 세계무역기구의 외국산 차별금지 조항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국내 규범에 대하여 세계무역기구 위반이라는 이유로 무효를 선언한 것은 처음이었다.
급식에서 한일갈등까지…WTO의 영향력
시간을 훌쩍 넘어 2019년 8월8일, 한국 정부는 아베 신조 총리의 무역보복에 대한 맞대응 조치로서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맞제외하는 것을 유보했다. 정부가 냉정하게 사태를 관리하는 이유는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한 세계무역기구 제소에서 한국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베 총리가 불화수소 등 반도체 3개 핵심 부품 허가를 지연시키기 위해 포괄허가 대상에서 삭제하고,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것은 명백히 세계무역기구 협정 위반이다. 백색국가란 군사 목적으로 사용될 우려가 있는 제품이라도 그 나라의 수출자가 ‘일반포괄허가’라는 허가증만 취득하면 수출을 쉽게 하도록 해주는 제도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로 백색국가로 인정하는 유일한 관계였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지난 2일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삭제했고,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7월에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에서도 한국에 대해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세계무역기구의 가트협정 10조 3항은 수출 규정을 일관되고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운용할 것을 회원국의 의무로 정한다. 그리고 11조 1항은 수출허가제도를 이용해 수출량 제한을 할 수 없게 했다. 더욱이 일본 스스로가 올해 세계무역기구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 판결에 참여해, ‘안보’를 이유로 무역 제한을 하려면 그것이 자기 나라의 필수적 안보 이익에 왜 필요한지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식 의견을 내놨다. 아베 총리의 무역보복은 세계무역기구 협정은 물론 일본이 내놓은 공식 의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전 국회의원 이길재가 1994년 국회에서 했던 말은 한국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어 세계무역기구 체제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우려는 현실이 돼 2005년의 급식과 2019년의 아베 무역보복에서 공통적으로 세계무역기구가 핵심 변수가 된 것이다.
개도국 지위 포기 후폭풍
세계무역기구와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훨씬 더 많은 사건이 세계무역기구의 이름으로 우리의 안방을 파고들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무역보복에 온힘을 다해 맞서고 있는 한국에 더 이상 세계무역기구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세계무역기구는 개도국에는 매우 유리한 ‘특별하고 다른 대우’(S&D)를 해준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는 외국 농산물에 매길 수 있는 관세 수준이 다르다. 한국이 외국쌀에 531%의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도 개도국 지위에 따른 쌀 협상 결과다. 한국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면 농산물의 관세가 대폭 낮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무역기구에서 개도국 지위는 당사국이 판단해 스스로 결정하는 ‘자기선언’ 방식이다. 한국은 1995년 농업 분야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정부는 세계무역협정 협정문이 지금 바뀌는 것은 아니므로 바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 압박에 아랍에미리트(UAE), 싱가포르는 이미 개도국 지위에 따른 혜택을 누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정부는 안일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한국이 놓여 있는 상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에서는 개도국이라고 선언하면서, 막상 미국, 유럽연합(EU), 오스트레일리아 등 농업 선진국과는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높은 수준의 협정을 체결한 나라다. 나는 2006년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탓에 한국이 더 이상 세계무역기구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기 어렵게 되는 근본적인 모순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 최강 농업선진국 미국과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서까지 시장 개방을 해놓고는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인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에는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며 시장을 덜 개방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묻고 또 물었다.(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의 농산물에 대해 낮은 관세를 매기고 있고 쌀만 예외로 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필요하고 유익한 협정이라면 그때부터 당연히 개도국 지위 변경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한국 소농의 현실과 살 길을 국제 규범으로 모색하는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했다.
|
지난 7월24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일본 수출 규제’를 정식 안건으로 상정했다. 한국은 일본의 수출통제 조처가 국제사회에서 끼칠 폐해를 설명하고 철회를 강력히 요청했다. 한국 쪽 수석대표인 김승호 산업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이 이사회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
소농은 특별하다
소농의 본질과 역할은 그가 속한 사회가 선진국이냐 개도국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다. 세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의 담당자는 카길이나 몬샌토가 아니라 세계의 소농들이다. 그들은 지역의 땅과 종자, 그리고 지역에 맞는 농법 지식을 몸에 지니면서 지역 순환의 농업을 담당한다. 한국의 소농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소농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 규범을 창출하는 데 일로매진해야 했다. 유럽연합과 같이 국내 소농이 자립할 수 있는 농업정책을 세계무역기구 차원에서 넉넉하게 보장받아야 했다.
소농들만이 눈물겨운 노력을 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9월28일 제네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채택한 ‘농민 농촌노동자 권리 선언’이다. 이 역사적인 국제 규범을 정립하기 위해 한국의 소농은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힘써왔고 결국 결실을 맺었다. 이 선언에선 인류 발전과 먹거리와 농업생산의 기반이 되는 생물 다양성의 보존 및 증진을 위한 소농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지속가능 발전의 핵심인 식량 보장에 대한 권리를 실현하는 데에 소농이 이바지함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유엔 회원국에 모든 농민 농촌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충족시킬 것을 요구했다.
앞으로도 소농이 지속가능하도록 세계무역기구 체제에 틈을 계속 내어야 한다. 한국 사회도 이 행렬에 동참하고 변화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그 예가 있다. 2005년 전북 학교급식조례에 대해 대법원이 무효 판결을 내리자, 한국의 소농과 시민사회는 아예 세계무역기구 협정을 바꾸어 학교급식에서는 우리 농산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 개정)
이제 유엔 소농 선언의 원칙이 세계무역기구 규범에 반영되도록 정부가 나서야 할 때다. 선진국에 있든 개도국에 있든 소농의 본질과 그 공헌을 인정하는 세계무역기구 체제로 바꾸도록 말이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으로 25년차를 맞이하는 한국이 세계무역기구와 국제사회에 이바지할 과제다.
송기호 변호사
광고
기사공유하기